이경렬(63) 전 주앙골라 대사. '창천(蒼天)'이라는 필명으로 왕성한 집필을 하고 있다. 8월 초 <브라보 한미동맹(진인진, 2025)>을 내놓았다. '숭미동맹의 그늘 벗어나기'라는 부제가 예사롭지 않다. 한미 관계의 실제와 이를 다루는 관료들의 가식과 위선, 한계를 파헤쳤다.
지난 3월엔 <명품외교의 길>을 펴내 "대한민국에 외교는 없다. 유사 외교 행위가 있을 뿐이다"라고 일갈했다. 지난 14일 서울 공덕동 <시민언론 민들레>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여러 차례 내용을 다듬었다. △ 미국의 변화, 한국의 변화. 브라보 한미동맹! △ 노무현에서 출발해 노무현 넘어서기 △ '외무부' 개혁 제언 등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소개한다.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인물사진은 게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주권 회복과 진짜 외교가 펼쳐질 날을 고대한다."
이경렬 대사가 지난 3월 펴낸 <명품외교의 길> 서문에 쓴 마지막 문장이다. 주권과 외교, 글로써 그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게 응축돼 있다. "한국 외교관은 외교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는 척만 한다"고 믿기에 외국 관련 사무를 보는 '외무공무원'으로, 외교부를 '외무부'라고 칭하는 이유다.
미국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미국에 잘 보여야 출세한다는 신념 또는 맹목에 포획된 '숭미 마마보이들'이 이른바 주류를 형성해 왔다는 인식. 은퇴한 외무공무원이 부지런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까닭이다. 기실, 그의 '모반'은 재직 중에 시작됐다.
-외무부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입부 5년쯤 됐을 때부터 조직 문화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외무공무원을 하겠다고 들어왔는데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무엇보다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두 번째 하는 일이라는 게 참 너절했다. 주한 미 대사관 3등 서기관이 보내온 편지나 번역해 장관에게 올리고, 또 그 답장을 쓰는 정도. 동료나 선배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라는 게 무슨 외교에 관한 토론은커녕 인사 이야기뿐이었다. 북미국이니, 일본국이니 자기들끼리 담장을 치고 자신들이 외무부를 이끌어간다는 허황한 자부심에 차 있었다. 나중에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 근무하면서 거듭 확인했지만, 별것도 아닌 일을 하면서 밖으로는 쉬쉬하더라. 두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갖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들킬까 봐 숨기고, 또 나라 팔아먹고 있는 짓을 하기 때문에 숨기는 것 같았다."
-자신의 33년 외무공무원 생활을 정의한다면?
"일찌감치 북미국과 같은 '핵인싸(인사이더)'를 멀리하겠다. 오라고 해도 안 가겠다. 앗싸(아웃사이더)로 새로운 길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보람을 느껴야 하지 않겠나.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나라를 손 들어서 갔다. 베트남, 키르기스스탄, 앙골라가 그랬다. 그러다 보니 '음지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생기더라. 외무부 내부 통신망 '나눔터'에 이런 생각을 틈나는 대로 글로 적어 올렸다. 은근히 따르는 동료, 후배들도 생겼다. 언젠가 한 후배는 '선배님, 팬 카페 있습니다. 한 100명쯤 돼요'라고 귀띔했다."
초대 장관 장택상, 처음부터 숭미조직으로 탄생
"미국 이익 앞장서 대변해야 출세" 80년 조직문화
-노무현 정부 당시 용산기지 이전과 전략적 유연성 협의 과정에서 '동맹파'와 '자주파' 간의 싸움이라는 언론보도가 많았다. 안에서 느끼기에는 어떠했나?
"동맹파, 또는 내가 숭미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외무부 안에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있다. 꽤 많다. 다만 언론이 명명한 '자주파'는 단언컨대 없었다. '위장된 자주파'가 있었을 뿐이다. 이석태 공직기강비서관도 용산기지 이전 협상 평가 보고서에서 적지 않았나. 동맹파인 북미 3과에서 '반미주의자들'이라고 지칭했던 국가안보회의(NSC) 인사들이 '실제로는 아이러니하게 협상과정의 대부분을 추인해 주었다'라고. 국익을 놓고 보면, 동맹파니, 자주파니 그런 구분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실력파와 비실력파,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실력파라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계속 들여다보면서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데 외무부 생활 33년 중 그렇게 공부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주요 7개국(G7)은 물론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중 관료 출신을 장관, 특히 외교부 장관 시키는 나라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일본은 외무성 관료가 올라갈 수 있는 정점이 사무차관으로 정해졌다. 왜 한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보나.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외무부는 이승만이 숭미 정권을 세우면서 만든 숭미 조직이기 때문이다. 초대 장관 장택상이 누군가. 미군정이 수도경찰청장을 시켰던 인물이다. 2대 장관 임병직은 이승만 비서 출신이다. 처음부터 미국의 앞잡이 부처였다. 80년 된 이야기다. 미국 이익을 앞장서 대변하는 선배들이 출세하는 모습을 보면서 후배들도 오로지 미국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군부독재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관습이다.
"군인들의 기본 관심사가 무엇이었겠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모두 미국으로부터 인정받는 게 가장 중요했다. 미국이라면 껌뻑 죽었다. 이미 그렇게 최적화돼 있는 조직이 외무부이다 보니 미울 리가 있었겠나. 민주화 이후에 교수 출신 장관들이 몇 명 있었지만, 특별히 다른 건 없었다. 미국이 달라는 것 퍼주는 게 주된 일이었다."
-외교가 특수 업무이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외교부 출신이 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영어도 잘해야 하고.
"밥그릇 챙기려고 들먹이는 말이 소위 전문성이다. 내가 볼 때 외무공무원들은 전문성만 없는 게 아니다. 함량 자체가 미달이 많다. 외무부 사람들 번지르르하게 얘기하지만 한 번 질의하고, 두 번 질의하면 더 이상 들어가질 못한다. 영어도 그런 식으로 한다. 재미있는 표현을 외워서 써먹으려고 하는 데 진짜 무슨 뜻인지 모른다. 외교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증표로 영어를 들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꾸 영어를 쓰는 데 기본적으로 생각이 짧다. 프리토킹이 안 된다."
외운 영어로 '전문성' 과시, 대화-소통 부족한 '외교'
다른 부처 공무원이 더 유창, 더 중요한 건 '국가관'
-외운 영어 표현은 잘 쓰는데 프리토킹이 안 된다는 말인가.
"기본적으로 외교의 ABC는 사람이 하는 것, 즉 말로 하는 거다. 그런데 외국 외교관들은 기본적으로 밥 먹을 때 업무 이야기 안 한다. 디저트, 커피 마실 때 딱 5분 정도만 한다. 그때까지 음악이나, 책,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의사소통한다. 파리 OECD에서 일할 때는 사르트르나 카뮈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 과정이 없이 곧장 업무 이야기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파탄 나기 십상이다. 의사소통을 해봐야 좋거나, 싫거나 감정이 생긴다. 의사소통을 안 하면, 좋은 감정은 절대 생기지 않는다. 업무 외적 대화를 해내는 게 바로 업무다. 실력파와 비실력파가 거기서 갈린다."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외교관이면 엘리트 관료로 알려져 있지 않나?
"외교는 도외시하고 출세만 바라보다가 외교가 엉망이 됐다. 제대로 할 실력이 안 된 것부터가 문제인데 그걸 모른다. 영어만 놓고 보아도 타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외무부 사람들보다 훨씬 잘 한다. 거기에 국가와 국민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췄다. 타 부처 공무원이나 학자들과 외무공무원을 붙여놔 보면 금세 안다. 외교부 사람들 몇 마디 못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누가 더 외교를 잘하겠나. 타성에 젖어서 하던 일이나 할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아이디어? 그럴 능력이 안 된다."
-이번 책에서 대한민국이 진짜 선진국으로 가는 데 검찰개혁과 언론개혁과 함께 외교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에겐 '한미동맹의 강화' 말고는 외교 목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외무부가 되뇌어온 '한미동맹의 강화'의 뜻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다 퍼준다는 의미였다. 용산기지 이전, 한미 FTA, 이라크 파병이 그랬다. 한미동맹이 외교의 수단일 뿐 그 자체가 지상과제가 될 수 없다는 각성이 절실하다.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추구하는 외교만이 명품외교라는 점을 각인할 필요도 있다."
북미국·아프리카국 정기 교체로 문화 바꿔야
인사국장 직급 낮춰 외부 출신 인사과장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검찰개혁보다 훨씬 쉬운 문제가 외무부 개혁이다. 다만 검찰처럼 해체 수준으로 개혁해야 한다. 국장급 이상 고위급 간부의 절반 이상은 외부의 비공무원으로 인선할 필요가 있다. 외부인으로 개혁 전담 차관직을 신설해도 좋을 것. 해외 공관장은 향후 1년에 걸쳐 전원 교체하고 신임자의 절반도 외부 인사로 충원해야 한다. 본부 조직의 대수술도 긴요하다. 정기적으로 북미국 직원을 예컨대 아프리카국이나 다른 국 직원들과 서로 교체해 뿌리 깊은 숭미 자취를 없애야 한다. 인사국장을 과장급으로 하향 조정하되 외부인에게 맡겨야 한다."
-<명품외교의 길>이 나온 뒤 전현직 외무공무원들에게 물어보니 이 대사에 관한 평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천재' '숨은 인재'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4차원'이라는 평도 있었다. "노 코멘트"라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이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책에 나온 외무부와 외무공무원의 실체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대놓고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외무부와 한국 외교에 대해 신랄하게 쓸지 몰라도 나름대로 보람차고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혜택받은 사람이 맞다. 외무부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관점에서 이 거지 같은 외무부의 환골탈태 개혁을 위해 이런 글을 남기고 싶었다. 진짜 외교를 한다면 내가 외교부를 더 이상 외무부라고 부를 이유도 없어지지 않겠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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