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통상 관계 안정화와 동맹의 현대화, 새로운 협력 분야 개척.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2일 언론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의 3대 의제로 제시한 내용이다. 각각 대한민국 경제·안보·미래를 담보하는 의제들이지만, '트럼프 충격'을 최소화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국익도 도모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새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이 늘 여론의 초점이 되는 것은 양국 관계가 그만큼 우리의 대내외적 상황을 규정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특히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우선 최근의 관세협상에서 여실히 노출됐듯이 기본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를 탈피하기 어려운 데다가 국가 간의 모든 관계를 현찰로 환산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주의 특성 때문이다. 두 가지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트럼프를 상대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불확실성이 더 높다.
양국 간 사전협의를 거쳤지만, 3대 의제는 우리가 정한 목표일 뿐 미국의 우선순위와 다를 터. 트럼프 관점에서 정상회담의 주제어는 '돈'과 '힘'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돈이 힘을 끌고, 힘이 돈을 끌어당긴다. 한미 간에 돈 문제는 지난 7월 30일 관세협상 타결로 갈래를 잡았지만, 아직 문서화하지 않았다. 세부 항목에 대한 협의와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조현 외교부 장관 등이 지난주부터 워싱턴에서 막판 대화를 한 까닭이다. 공식적으로는 '정상회담 의제 조율'이지만 실제론 회담 뒤 트럼프가 자랑스레 들어 올릴 '트로피'를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럼프가 정상회담에 대해서 한 말도 '돈' 얘기에 집중됐다. 지난 7월 30일 한미 관세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X 계정 게시글에는 숫자가 두 개 나온다. 먼저 한국의 대미 투자 펀드의 규모가 3500억 달러라고 밝히면서 "(기금은) 미국이 소유하고 통제하며, 미국 대통령으로 나 자신이 (투자 대상을) 선택한다"고 선언했다. 한국(기업)의 또 다른 투자금 1000억 달러를 언급한 뒤 곧바로 '이러한 총액'은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발표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1000억 달러 '플러스(+)알파'를 기대하는 심리가 엿보인다. "한국이 자동차와 트럭, 농산물 등 미국 상품에 교역 시장을 개방할 것"이라는 말로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또는 회담 뒤 자신의 X 계정에 소개할 '트로피'들을 미리 나열한 셈이다. 미국산 무기를 중심으로 우리의 구매 리스트 발표도 예상된다.
위 실장은 언론브리핑에서 농축산물 수입과 관련, "미국이 계속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협의 중이지만 우리 입장은 큰 변화가 없다"고 확인했다. 미국의 요구는 아메바처럼 끊임없이 생겨난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21일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회동했고,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2일 워싱턴에 도착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 등과 머리를 맞댔다. 불과 20여 일 전, 즉 7월 30일 관세협상 타결 이후 미국 측의 새로운 요구 또는 기존 합의 수정 문제가 다뤄지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논의 상대에 에너지부 장관이 포함된 것은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에 근거해 한국 기업들에 상당한 보조금을 약속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신들이 지급할 보조금만큼 우리 기업, 특히 반도체의 지분을 제공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위 실장은 22일 언론브리핑에서 "아직 보조금을 받은 우리 기업이 없어서 당장 현안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위 실장이 세 번째 의제로 꼽은 '새로운 협력 분야 개척'은 당장의 현안이라기보다 현안을 풀기 위한 준비 작업 또는 선언적인 합의의 성격을 지닌다. 기술협력에 대한 우리 측의 희망도 담겨 있다. 말그대로 '개척'분야다. 그는 원자력·조선·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기술·국방분야 연구개발(R&D) 분야를 언급하면서 "상세한 내용은 정상회담 이후에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원전 협력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체코 원전 사업을 수주하면서 미 웨스팅 하우스와 맺은 굴욕적인 협정 내용이 최근 공개되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는 분야다. 한수원이 수출하는 원전 1기 당 8억 2500만 달러(1조 1400억 원)의 기술사용료·기자재 및 용역 구매금액을 제공키로 했고, 향후 50년 간 북미와 유럽 대부분 국가, 일본 등에는 수출을 못 한다.
정부가 이러한 불공평 계약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책을 찾아낸다면 쾌거가 되겠지만,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발표된다면 두루뭉술한 '협력 다짐'에 그칠 공산이 크다. 미국은 원자력은 물론, AI와 첨단기술, 국방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에 기술을 제공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미국이 우리의 기술을 넘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우리 반도체 기업에 지분 참여를 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돈과 관련된 부분을 정리하면 △ 한국 기업들의 투자 총액 발표 △ 농축산물 수입 개방 △반도체 지분 제공 △ 무기를 비롯한 미국산 상품 구매 약속 △ 새로운 협력 분야 개척에 관한 선언적 합의 문안 등이 회담 직전까지 양측이 머리를 맞대는 대목이며, 이 중 일부가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반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2일 한미 외교 장관 회담에서 양측은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미래지향적 의제와 안보·기술·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 사업을 점검했다." (외교부 보도자료)
정상회담은 세부 사항을 놓고 정상 간 협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실무 차원에서 논의된 결과를 모아 발표하는 자리다. 종종 정리가 덜 된 분야에 대해 큰 틀에서 거중 조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독특한 또는 변칙적인 스타일로 미루어 특히 돈과 관련된 문제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역으로 미국 측 요구사항과 관련해 트럼프가 직접 압력을 넣는 자리로 활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이고 주권국가에서 국민의 기대를 충족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는 책임감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전용기 기내 간담회에서 다짐한 각오다. "(한미 간)일단 한 합의를 쉽게 뒤집거나 바꾸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우리 생각"이라고 말해 기존 합의의 수정에 대해서는 일단 선을 긋겠다는 방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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