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2025년은 2018년이나 2019년이 아니다.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그 능력에 있어서 또 지정학적 환경도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인정은 앞으로 모든 것을 예측하고 사고하는 데서 전제로 되어야 할 것이다. (…) 미국이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패한 과거에만 집착한다면 조미 (국가수반) 사이의 만남은 미국 측의 '희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28일, 김여정 대미 담화)
북한이 대남, 대미 담화를 잇달아 내놓았다. 작성일은 28일이지만, 대남 담화는 28일 오전, 대미 담화는 29일 오전 각각 공개했다. 전승절(정전협정 기념일) 행사를 치른 하루 뒤에 담화를 내놓은 걸로 미루어 작심하고 내놓은 메시지다. 미국이 비핵화 논의를 포기하면 정상 간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게 요지.
대미 담화는 백악관 당국자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세 차례 이뤄진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하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정상회담을 언급한 것을 문제 삼았다. 대남 담화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변화가 눈에 띈다. 공격적인 표현 대신에 완곡한 설명 방식을 택했다. "트럼프 대통령-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전제했지만 요지는 명확했다.
김여정은 2025년의 '현실'이 북미 정상이 만났던 2018~2019년과 두 가지 점에서 다름을 지적하며 "그 누구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착각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북한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지정학적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가 두 가지 달라진 현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는 "전체 조선인민의 총의에 의해 최고법으로 고착됐으며, 이를 부정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철저히 배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적 지위를 수호함에 있어서 그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 있다"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이른바 핵무력의 '제2의 사명(공격적 사용)'을 에둘러 표현한 것. '지정학적 변화'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동맹을 복원한 북러 관계를 염두에 둔 것 같다.
담화는 "핵을 보유한 (북미) 두 국가가 대결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결코 서로에게 이롭지 않다"라면서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출로를 모색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북미 지도자 간 친분을 상기시키면서도 "개인적 관계가 비핵화 실현 목적과 한 선상에 놓이게 된다면 (상)대방에 대한 우롱으로밖에 달리 해석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반응도 명확했다. 백악관 당국자는 28일 로이터통신의 질의에 "대통령은 그러한 목적(비핵화)을 유지하고 있다"라면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지도자 김과의 대화에 열려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취임 뒤에도 김정은과의 친분을 강조하며 대화 희망을 여러 차례 내보였다.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도 인정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측이 트럼프의 친서를 뉴욕 북한대표부 외교관들에게 전달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수령을 거부당한 사실도 NK뉴스 보도로 확인됐다. 그러나 대화의 목적이 비핵화라는 입장을 공개 철회한 적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공약에서 평화체제 논의를 비핵화 이후로 미뤘다.
김여정의 메시지의 내용은 새로운 게 없다. 남북관계를 여전히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두고 있고, 비핵화 의지가 털끝만큼도 없음을 거듭 확인했다. 대통령의 평화통일 의무를 헌법에 규정해 놓은 한국이나, 비핵화를 정책목표로 두고 있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한국과 미국에 대해 사용한 언어의 변화가 더 주목되는 까닭이다.
김여정 담화의 언어는 우호적이지 않되,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굳게 빗장을 걸고 자력갱생을 강조해 온 북한이 한미와 새로운 관계 탐색에 조심스레 나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국가간 관계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가 출발점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실제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남 담화가 이재명 정부 출범 55일 만에 나왔다면, 대미 담화는 작년 11월 5일 미국 대선 8개월 만에 나왔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취임을, 지난 6월 5일 더불어민주당 후보 이재명의 21대 대통령 당선을 각각 '국제소식' 란에 단신으로 전한 뒤 침묵을 지켜왔다. 김여정은 미국 전략자산의 조선반도 배치(3월 3일)와 미·한·일의 비핵화 집념을 비난(4월 8일)하는 담화를 내놓았지만, 북미 정상 간 개인적 친분은 거론하지 않았다. 이번 담화가 모종의 '시그널'로 읽히는 대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이재명 정부는 북한과 시그널 대화를 해 왔다. 이재명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이나 삐라 살포를 중단하는 '성의 있는 노력'을 보였고, 북한은 상응 조치로 화답한 대표적 사례다. 김여정 담화는 김정은과의 대화 희망을 계속 피력해 온 트럼프에 대한 답변이다. 북한의 뚜렷한 지향점은 근본적 문제 해결을 미룬 채 '현상유지'를 하자는 것으로 확인된다.
12.3 내란 수괴 피의자가 202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른바 '담대한 구상'을 밝히자 김여정이 사흘 뒤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며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 것에서부터 반걸음 나왔다. 대남 담화에서 '적대성'과 '전쟁(완전한 교전국 관계)'을 걷어냈다면 대미 담화에서는 '이념'과 대결적 태도를 없앴다. 북한은 작년 말 당중앙위 제8기 제11차 전원회의 결정문에서 미국을 '반공을 변함없는 국시로 삼고 있는 가장 반동적인 국가적 실체'로 규정하며 "국익과 안전보장을 위해 최강경 대미 대응 전략을 강력히 실시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번엔 비핵화만 다루지 않으면 대화에 열려있음을 시사함으로써 역시 반걸음 나왔다. 그러나 한미가 나머지 반걸음을 떼기 어려움을 북한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비핵화 논의가 없이 김정은과의 만남 자체를 추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벌인 군사분계선 월경 장면 연출처럼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이다. 이재명 정부의 당국과 민간이 남북이 아닌, 대한민국 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간의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북한을 대좌하는 것보다 먼저 성사될 수 있다. 그러날 북한은 국가 대 국가 관계일지라도 민간 접촉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12월)과 평앙문화어보호법(2023년 1월) 발동 이후 남측 주민과의 접촉을 극도로 경계한 지 오래다. 김여정이 담화에서 '개별적 한국인들의 조선관광 허용'을 '성의 있는 노력'에 포함하면서도 일절 평가하지 않은 것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 주민 접촉이 없는 국가 대 국가 관계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데 한계가 분명하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대북정책의 추동력이었던 광범위한 지지가 없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미가 북한을 상대로 각각 발산해 온 긴장완화의 시그널은 북한의 나쁘지 않은 화답으로 효능성이 입증됐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28일 한미 연합연습 을지자유의 방패(UFS) 조정을 건의하겠다는 말도 시그널의 하나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딱 거기까지다. 김여정 담화에는 적극적인 현상 변경의 의지도, 대화에 나오겠다는 신호도 없었다.
담화는 한미 연합연습과 관련, "침략적 성격의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의 연속적인 강행으로 초연이 걷힐 날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데 그쳤다. 과거처럼 한미 합훈의 중단을 강력히 요청한 게 아니었다. 한미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연합연습을 조정했지만, 김정은이 신년 연설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 의향을 밝힌 뒤였다. 지금 북한은 근본적인 문제를 놔둔 채 당분간 공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북한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2021~2025)의 마지막 해, 목표 달성에 여념이 없다. 어떤 변화든 내년 초 제9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많은 이유다. 성급하게 한 걸음 다가가기보다 당분간 '시그널 대화 체제‘를 유지하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본다. 냉·온탕을 오가듯 '좋은 관계'로 직행하기는 어렵다. '나쁘지 않은 관계'가 더 유용한 시기다. 헌법 정신과 국민 정서를 염두에 두되 긴 호흡으로 접근하길 바란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의 충고가 새삼 와닿는다.
"가끔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북한이 전화를 안 받고 문을 잠가 놓았다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대화할 준비가 됐음을 계속 북한에 알릴 필요는 있다. (필요하면) 언젠가 대화에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8일, DJ도서관 대담)
'관세'가 '안보' 도울까? 두 번째 고비는 첫 한미정상회담 (14) | 2025.08.01 |
---|---|
마침표 없는 대미협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9) | 2025.08.01 |
'적대적' 표현 걷어낸 김여정 대남 담화, 달라진 북한의 언어 (5) | 2025.07.29 |
[트럼프의 약탈 ①] "안보·경제 한바구니에…" 한미 원스톱 쇼핑 유효한가? (7) | 2025.07.29 |
대일 무역전쟁 승리? 미국이 지출할 비용도 솔찮다 (2) | 2025.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