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멋대로 설정한 관세협상 마감일(8.1)이 다가온다. 대한민국만 막바지 협상에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멀리 2016년 대선 유세 때부터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의해 벗겨 먹혔다(ripped off)고 우겨 온 트럼프는 지난 4월 2일, 이른바 '상호 관세'를 발표하며 '미국 해방의 날'로 선포했다. 미국이 해방된 날, 각국은 구속된다. 이제 미국이 각국을 벗겨 먹을 시간이라는 것. 한미 관세협상단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트럼프 취임 이후 국내 및 국제적으로 진행된 과정을 되짚어 본다.
안보 문제도 수익 창출의 대상
당사국에 절실한 안보 문제도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장부상 지출/이익의 항목일 뿐이다. 지출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대상인 것. 안보와 경제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부터 한 바구니에 담겼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에는 핵심 공급망의 안전을 운운하며 외국 기업의 공장을 미국에 유치했다. 트럼프 시대엔 더 노골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안보적으로 '충격과 공포'를 조성한 뒤 경제적 빨대를 꽂는 방식이다.
조만간 윤곽이 드러날 한미 관세협상 합의문에 우리의 국방비 증액과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이 포함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점, 안보 문제가 특히 크게 걸려 있었던 우크라와 일본이 각각 미국과 타결한 협상 결과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24일 방미를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미국과 관세뿐 아니라 안보·투자·동맹까지 포함된 패키지딜(묶음 타결)을 조율 중"이라고 말해 트럼프식 원스톱 쇼핑이 유효함을 확인했다. 실제로 안보의 어느 항목이 미국과 조율 중인 패키지딜에 담겼는지는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한국과 관련해 안보 문제를 언급한 대목은 주로 주한미군 감축 또는 2025년 1조 4028억 원인 방위비분담금을 댓바람에 100억 달러(13조 7000억 원)로 올리라는 두 가지다.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5월 23일 주한미군 2만 8500명 중 4500명을 괌을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 이동 배치가 검토되고 있음을 전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보면 막연히 미국의 안보 공약을 기대하며 섣불리 지갑을 열기도 어렵다.
안보·경제 원스톱쇼핑, 우크라의 경우
트럼프식 안보·경제 협정이 처음 문서로 구현된 건 지난 4월 30일, 우크라이나와의 광물협정이었다. 협정문의 공식 명칭은 '미국-우크라 재건 투자 기금(USURIF) 설립 협정'이다. 안보와 관련된 트럼프의 약탈적 논리를 들여다보기에 유용한 텍스트다.
티타늄과 우라늄, 리튬, 흑연, 망간, 희토류 등 전략 광물 개발 이익의 50%를 출자해 공동기금을 만든다는 것. 기금은 우크라 광물자원 개발에 재투자되고 재건과 인프라 개발에도 사용된다. 트럼프의 약탈적 논리는 △미국의 안보지원을 출자금으로 간주하며 △50 대 50의 파트너십 △미국 기업이 장기 구매 계약 협상권을 갖고 제3자보다 유리한 조건 보장 등에 명시됐다. 협정문에 숫자를 적지 않았지만, 미국이 공개적으로 주장한 투자기금 규모는 5000억 달러(720조 원)이다. 희토류를 비롯한 우크라 자원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 점령지에 있다거나, 우크라의 인프라 개발 미비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프로젝트라거나 하는 사실은 트럼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협정문이 체결되기까지 트럼프 특유의 X 계정 장광설이 쏟아졌다. 전쟁의 책임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에 두는가 싶더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의 '낮은 국방비'를 빌미로 미국이 방위공약을 철회할 것임을 거듭 내비쳤다. 모두가 전쟁과 평화를 바라볼 때 트럼프는 집요하게 돈만 바라봤다. 우크라의 정권 교체 가능성도 띄웠다. 우크라의 광물자원과 러시아와의 '놀라운 경제협력(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노린 트럼프의 담대한 희망은 일단 실행이 미뤄졌다. 러시아가 공세를 확대하면서 종전/휴전 전망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안보 문제 제외한 미·일 관세협상
우크라 안보에 관한 트럼프의 셈법은 미국의 패트리엇 방공미사일 추가 제공 방식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트럼프는 지난 14일 백악관을 방문한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의 회담 중 우크라에 패트리엇 미사일을 포함한 첨단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무기 대금은 미국이 아닌, 유럽연합(EU)이 부담한다고 밝혔다. 우크라는 미국의 안보 지원을 기대하고 광물협정을 맺었지만 "우크라 안보는 유럽의 문제"라는 트럼프의 사고는 그대로다.
22일 발표된 '미·일 전략적 무역 및 투자 협정'은 아직 원문이 공개되지 않았다. 백악관은 트럼프의 말을 정리한 '설명자료(Fact sheet)'만 공시했다. 같은 날 타결한 '미국-인도네시아 상호 무역 협정' 공동성명문을 공시한 것과 대조된다. 일본이 자동차를 포함한 '상호 관세'를 25%에서 15%로 선방했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불평등한 협정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합의한 이유의 하나는 안보 문제 때문일 터. 미국이 지난 6월 7일 백악관 미·일 정상회담에서 안보상의 공약을 확인한 만큼 관세협상에서 약속한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후불'일 수도 있다.
위 실장은 줄곧 한미 관세협상에 '안보'와 '동맹'에 한 바구니에 담길 것이라고 말하지만 미국이 주한미군 역할 변경(전략적 유연성)과 방위비분담금, 국방비에 관한 구체적 제안을 먼저 해 온 정황은 찾기 어렵다. 미국 본토 국방을 최우선하고 인도태평양 동맹과 파트너의 역할을 늘린다는 국방전략(NDS) 작성의 기본 원칙 외에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면 그 내용이 더 궁금해진다. 그런데 위 실장은 이번 방미 길에 루비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과 대면 협상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전화 통화만 하고 왔다.
통화로만 안보·동맹 패키지 논의?
일각에서 제기하는 미 해군함정의 유지보수·수리·정비(MRO) 또는 선박 건조 등을 광의의 '안보' 문제로 묶는다면 전혀 무관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일은 이번 협상에서 상업용·군사용 선박 건조를 대미 투자를 통해 기여할 미국의 산업 생산력 증대 부문에 포함했다. 백악관은 △액화천연가스(LNG)를 포함한 에너지 인프라 및 생산 △반도체 제조 및 연구 △핵심 광물 채굴·가공·정제 △의약품·의료기구와 함께 일본의 '투자' 대상으로 분류했다.
어떤 방식이건 국방 관련 합의 또는 거래가 이뤄지려면 우선 한미정상회담에서 기본적인 안보 공약을 확인한 뒤 안보실장이나 장관급에서 협의가 이뤄지는 순서가 맞다. 이재명 정부의 안보전략을 수립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 경우에도 방위비분담금이나 주한미군 역할 변경, 국방비 인상 등은 장관급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협상 시한을 며칠 남겨놓은 시점에서 여전히 안보-경제 묶음 타결을 강조하는 것은 궁금증만 늘리는 게 아니다. 국민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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