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란가?" "저게 대한민국인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바리케이드를 통과한 시간은 3일 오전 8시 2분. 그러나 5시간이 넘도록 끝내 관저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12.3 내란의 수괴로 지목된 대통령 윤석열(이하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이 저지된 것.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하루가 멀다고 해괴한 일이 벌어졌지만, 이날을 기준으로 책임 소재가 달라진다. 윤석열이 이전까지 국민적 우려의 장본인이라면, 이날 혼란의 책임은 온전히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최상목에게 돌아간다. 그 시간 최상목은 놀랍게도 중소기업인들과의 신년 인사회에 자리했다.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로 이동해 덕담을 내놨다. "중소기업이 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중소, 중견 기업 대상으로 임시 투자세액공제를 도입하고 시설투자 가속상각 특례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의 민생 신속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내수 회복을 적극 지원하겠다"라고도 했다던가.
대통령 경호처가 정당한 법 집행을 가로막는 기막힌 대치 장면이 하냥 길어지는 가운데 최상목이 내보인 한바탕 부조리극이자, 부작위의 극치였다. 전 국민은 물론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졌다. 윤석열이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계엄군을 보낸 장면에 세계가 놀랐다면, 공수처-경호처의 대치 장면은 세계를 의아하게 했다. 최상목은 2일 "대통령실과 경호처에서 적절하게 판단해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것으로 본다"라는 입장 아닌 입장을 내놓은 뒤 입을 닫았다.
국민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건 물론 세계의 상식을 저격한 한마디였다. 대통령 경호처에 대한 지휘와 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그가 던진 유체 이탈 '법어'였다. 그리곤 체포영장 집행 당일 인사회를 찾아간 게 3일, 권한대행의 중책을 맡은 최상목의 작태였다. 그사이 일개 경호처 따위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권위를 뭉갰다. 공수처가 오후 1시 30분쯤 "계속된 대치 상황으로 사실상 체포영장 집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집행 중지를 발표하기까지 최상목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경호처는 비상계엄 해제 뒤에도 수 차례 대통령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부해 왔다. 익히 예상된 공수처-경호처의 대치 상황을 예방하려면 진즉 경호처장 박종준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했어야 했다. 최상목이 보여준 '부작위'의 핵심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안정 궤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강조해 온 그의 지론에도 어긋나는 부작위였다. 윤석열 체포영장이 집행된다는 소리에 증시가 오르고, 환율이 내려갔다. 드디어 한국경제의 불확실성이 걷힐 수도 있다는 기대심리에서였다. 최상목은 그러한 기대심리를 꺾은 건 물론 불확실성을 키웠다. 그런 그의 평생 직업이 '경제 관료'이다. 윤석열만 세계를 놀라게 한 게 아니다. 최상목도 그 대열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의 행태는 그러나 대한민국 내부에서 켜켜이 곪은 환부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내란 이후 국무총리 한덕수(이하 한덕수)에 이어 최상목이 보여 온 '관료다움'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행태의 연장이었다.
국회의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 1차 표결(12.7)이 무산된 뒤 9일 부총리 자격으로 국회를 찾은 그는 내년 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은 정부 예비비를 정부안대로 증액한 예산안을 그대로 달라는 강짜였다. 필요할 때 숨는 관료의 유전자는 불필요할 때 발휘됐다. 지난달 27일,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3명 임명조차 거부한 직전 권한대행 한덕수에 대한 탄핵요구안이 표결 전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는 내각 전체에 대한 탄핵소추와 다름없다"라는 기이한 논리로 탄핵소추 재고를 요구했다.
한덕수에 이어 권한대행 자리에 앉은 뒤의 행태는 점입가경이었다. 전임 한덕수처럼 '여야 합의'를 주워섬기며 입법부에 호령했다. 지난달 29일 초유의 헌재 재판관 쪼개기 임명이 1차 하이라이트였다. 여야가 합의해 더불어민주당 2인, 국민의힘 1인 각각 추천한 결정을 거슬러 '여야 합의'를 핑계로 1인의 임명을 보류한 것.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줄타기한 초유의 잔꾀였다. 그 탓에 양쪽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다. 국회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 혐의에 대해서도 헌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 엘리트 관료의 특성은 성실하고 영민하되 최대한 책임을 피하는 것으로 회자된다. 오죽하면 "관료는 한쪽 주머니에는 (특정 조치가) 되는 이유를, 다른 쪽 주머니에는 안 되는 이유를 각각 서너 개 들고 다니다가, 상황에 따라 꺼낸다"라는 말이 수십 년째 내려오겠나. 한덕수, 최상목은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의 한 명일 뿐이다.
12.3 내란의 '망외의 기대 소득'은 대통령 권력과 군, 관료 사회에 뿌리내린 '환부'를 도려낼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45년 전 계엄령 선포 당시로 돌아가면 관료들의 제 몸 지키기 행태는 최규하에서 비롯됐다. 국무총리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다시 8개월 동안 대통령을 거쳐 건국공로훈장을 달고 국정자문회의 의장 등 순탄한 삶을 살다가 87세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으려는 게 한덕수의 길이다. 두 차례 국무총리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지만, 질긴 관료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한동훈 당시 여당 대표와 함께 야당 당사에서 공동 국정운영을 운운하더니 탄핵안 가결로 집에 돌아갔다.
윤석열의 내란 시도가 군사반란의 수괴이면서도 평안하게 살다 간 전두환의 자연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민화합' 따위로 국사범의 죄를 덮을 일이 아니었다. 출세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친위 쿠데타의 손발이 된 육사 출신 군 지휘부 역시 대수술 해야 한다. 더 넓게 퍼져 있는 관료의 환부에도 '칼'을 대야 한다.
더 이상 "국가를 맡겨달라"는 관료집단에 막연한 기대를 가져선 안 될 일이다. 기회주의적 줄타기로 평생 관료의 꽃길을 걷다가, 연금 '따박따박' 받으며 안락한 노후를 살겠다는 꿈을 제도적으로 깨야 한다. 전두환의 자연사와 대통령 1인에 대한 군의 맹목적 충성 문화를 방관한 후과를 국민이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관료의 난'도 싹을 잘라야 한다. 헌법과 법률, 무엇보다 공직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영예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한덕수에 이어 최상목이 온몸으로 내보이는 국가의 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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