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이는 아무리 여러 해 묵어도 용이 될 수 없다. 용이 되려고 해서도, 용이 되어서도 안 된다. 대통령 윤석열(이하 윤석열)의 위헌, 위법적인 12.3 비상계엄 이후 관료들이 권력 행사를 멋대로 하고 있다. 비상한 상황에 비상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목불인견의 사태가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상목(이하 최상목)은 31일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3명 가운데 여야 각각 1명씩만 임명하고 나머지 한 명은 추후 '여야 합의' 시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장면1, 입법부에 호령하는 권한대행
국회 추천 몫인 재판관 3명의 임명을 두고 '여야 합의'를 운운하다가 직무 정지된 국무총리 한덕수(이하 한덕수)의 뒤를 잇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꼴이다. 그런데 누가 권한대행에게 헌법에 따른 국회의 결정을 자의적으로 번복, 수정할 권한을 주었나. '헌정사의 관행'을 거론한 대목이 압권이다. 헌법과 법률상 근거를 찾지 못했기에 갖다 붙인 억지 논리임을 고백한 것. 최상목은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부인 김건희에 대한 15개 의혹을 수사 대상으로 정한 쌍특검법안에 대해서도 "국익을 침해하는 법안"이라고 멋대로 규정했다. 한덕수의 뒤를 이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겠다면서 내놓은 말이다.
헌법재판관 추천도, 쌍특검법안도 모두 본회의에서 가결된 국회의 최종 결정이다. 이를 뒤집어 다시 합의를 시도하라고 통지하는 것은 이무기가 '용'의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국민의힘이 12.3 내란의 수습을 거부하면서 친위 쿠데타 옹호 세력을 자처하고 있는 마당에 여야 합의를 거론한 건 책임을 회피하려는 기회주의적 발상이다.
"여야 합의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주장이며, 국회 논의 과정을 왜곡한 것"이라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질타에 귀를 열 일이다. 우 의장은 "국회의장 중재로 헌법재판관 추천 몫 배분에 여야 원내대표가 협의해 각각 1, 2명을 추천키로 합의한 것"이라며 최상목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여야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4.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말로는 삼권 분립을 주워 담으면서 권한대행이 입법부 위에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말이다. 검란, 군란에 이은 '관료들의 난'이 해를 넘겨 계속되는 것.
윤석열을 제외한 친위 쿠데타 주역들의 신병을 독점한 채 수사를 이어가는 검찰에 대한 국민적 불신에 눈을 감았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디올백 수수, 지방선거와 총선개입 등 김건희에 쏟아지는 정당한 의혹을 해소하는 게 국익에 위배된다는 논리 역시 지극히 자의적 판단이다. 윤석열의 자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러고서 내놓은 변명도 해괴하다. "하루라도 빨리 정치적 불확실성과 사회 갈등을 종식시켜 경제와 민생 위기 가능성 차단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에 헌법재판관을 (2명만) 임명하기로 했다"고 둘러댔다.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갈등을 종식하기 위해서라도 조속히 헌재의 정상 가동과 쌍특검이 필요하거늘, 의도적으로 에돌아가겠다는 말이다.
관료들의 위헌적 권한 행사 시도는 한덕수에서 시작됐다. 국회가 지난달 4일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킨 나흘 뒤 느닷없이 국민의힘 당사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공동담화를 통해 당정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권한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국정을 도맡겠다는 초헌법적 발상이었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고, 쌍특검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 역시 국회를 하위 권력으로 보는 오만방자한 행태였다. 한덕수와 최상목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들이 비상시국을 헤쳐 나갈 인물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권한대행의 모자를 쓴 관료들이 잇따라 국회를 무시하는 것은 야당이 더 이상 국무위원 탄핵소추를 추진하는 데 정치적 부담이 있을 거라는 추정에서 비롯된다.
#장면2, 웃픈 집단 사의
더 황당한 장면은 최상목의 결정 뒤에 나왔다. 꼴불견이 이어졌다. 헌법재판관 2/3 임명에 반발해 권영세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필두로 국민의힘이 반발하고, 대통령실 참모진이 집단 사의를 표명했다. 박종준 경호처장은 사의 행렬에서 빠졌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성태윤 정책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장호진 외교안보특보 및 수석비서관 전원의 사의는 이중의 의아함을 자아낸다. 우선 이들이 여전히 현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렸다.
대통령이 45년 만에 위헌적 계엄령을 내려 국내외적으로 충격을 준 마당에 응당 사표를 내고 자리를 비웠어야 할 인사들이다. 비상계엄 자체가 이들이 밥을 버는 근거인 대통령 보좌의 치명적 실책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헌재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필요한 재판관 임명에 반발하는 것은 내란 수괴를 옹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웃픈 장면도 벌어졌다.
권영세 위원장은 참모진 집단 사의에 대해 1일 "국정 안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결정,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놓았다. 최상목은 기재부 언론공지를 통해 "사표를 수리할 계획이 없다"라면서 "지금은 민생과 국정 안정에 모두 힘을 모아 매진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를 막지 못한 이들이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국정 안정이라는 발상이 창의적이다.
#장면3, 훈훈한 또는 해괴한
보좌할 대통령이 직무정지된 상태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즉 나가야 했을 이들이 불쑥 사의를 표명하고, 이를 만류하는 모양새는 훈훈한 장면이 아니다. 국민적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권 위원장은 최상목이 주문한 '여야간 추후 합의'에 대해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덕수-최상목의 여야 합의 거론 자체가 하나 마나 한 말임을 100% 입증한 셈이다.
이쯤 해서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덕수에 이어 최상목을 탄핵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야당의 정치적 부담보다 조속한 헌정 복귀가 더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지정 생존자' 제도를 원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국정연설을 비롯한 대통령과 주요 각료들이 모두 참석하는 행사 시 특정 각료를 지정해 모두가 궐위 되는 사태에 대비하는 제도다.
헌법 제71조(권한대행)와 정부조직법 제12조(국무회의), 제26조 1항(국무위원 순위) 등에 따라 경제부총리 다음은 사회부총리(교육부 장관)-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외교부 장관 순이다. 교육부 장관 이주호와 과기정통부 장관 유상임이지만, 두 명 다 한덕수-최상목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유상임은 지난달 27일 국회 상임위에 출석, 국무위원의 무한책임을 지적하는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타에 "무슨 뻔뻔함을 (보였는가)"라고 대거리하며 "의원님을 지금 국민들이 신뢰한다고 생각하시는가"라며 되받은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최상목-이주호-유상임을 아예 한목에 직무정지시키고, 그 다음 조태열 외교부 장관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23일 총리실에 따르면 추가 국무위원 탄핵이 5명 이상만 안 되면 국무회의 의결에도 문제가 없다. (연합뉴스)
단 한명도 사퇴하지 않은 '철면피 내각'
평생 조지훈 시인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공직생활을 해온 조 장관은 글로벌 관점에서 헌정질서 복귀를 주도할 자리에 그나마 적합도가 높아 보인다. 오는 20일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취임을 앞두고 그렇지 않아도 외교의 부재가 국민적 불안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화수행(附和隨行), 즉 줏대없이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행동한 국무위원들이다. 최상목을 비롯해 극히 일부가 비상계엄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 누구하나 사표를 던진 이가 없는 '철면피 내각'이다. 여기에 한덕수, 최상목의 잇따른 악수로 국정의 안정과 국민적 신뢰가 더 멀어지고 있다. 외교 장관은 최소한 글로벌 기준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 내각이 얼마나 남우세를 사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믿는다.
민주공화국은 선출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국회가 대통령 권한대행들에게 무시당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권한대행 우선순위 3인이 모두 의회 지도부이다. 부통령(상원의장)-하원의장-상원 임시의장 순. 그다음 행정부 각료 15명 중에서 외교부 장관(국무부 장관)을 가장 상위에 둔다.
대한민국 국민이 '이무기의 난'을 계속 지켜봐야 할 처지다. 오죽하면 신년 벽두부터 이런 제안을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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