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페루에서 대통령 윤석열(이하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새삼 조명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12.3 비상계엄을 거울로 2년 전 페루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셀프 쿠데타를 새삼 들여다보고 있는 정도다.
페루 언론은 3일 의외로 고위공직자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의 윤석열 체포 및 압수수색 영장 집행이 실패한 소식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일부 언론이 외신을 인용해 소개했을 뿐이다. 페루에선 그다지 주목할 만한 소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중 인터넷 독립언론 라엔셀로나(La Encerrona)가 지난달 4일 '쿠데타의 데자뷔(다시 보는 쿠데타)'라는 자막으로 소개한 동영상 뉴스가 눈길을 끌었다. '한국 덕분에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라는 자막이 달렸다. 궁지에 몰린 끝에 2022년 12월 7일 국회 장악을 시도하다가 결국 탄핵, 축출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새삼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것.
한국을 '거울'로 본 페루의 쿠데타 이후
친위 쿠데타 1달이 넘도록 아직 내란 수괴의 신병조차 확보하지 못한 답답한 상황. 페루를 거울로 삼아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비쳐본다. 윤석열과 카스티요의 비교는 국회 장악 시도와 탄핵안 가결이라는 점에서만 유효하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과 이후 사법처리 과정은 비교할 만한 점이 거의 없다. 공통점은 2021년 7월 취임 뒤 여소야대 정국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21대 국회에 이어 지난해 4.13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밀려 원내 제2정당에 머무르고 있다. 페루의 집권 여당인 '자유 페루(Free Peru)'는 카스티요의 취임 당시 130석 중 37석으로 원내 제1당이었지만 과반수에는 크게 못 미쳤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 게이코가 이끄는 인민의힘(24석)과 인민부활(16), 고온컨튜리(7석) 등 보수야당의 위세에 밀렸다.
게이코의 인민의힘은 카스티요 취임 4개월 만에 '도덕적으로 대통령직에 부접하다'는 이유로 첫 탄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022년 2월 인민행동당 출신 마리카르멘 알바 국회의장이 후지모리주의자들과 연합해 시도한 두 번째 탄핵도 무위에 그쳤다. 세 번째 탄핵소추안이 상정된 건 운명의 12월 7일.
카스티요는 '셀프 쿠데타'라는 악수를 두었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와 맥락이 비슷하다. 카스티요는 국회의 국정 방해를 빌미로 국회 해산과 전국적인 통행금지, 비상사태 정부 설립을 발표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셀프 쿠데타와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극명하게 갈린다.
국회 해산 발표 직후 카스티요 정부의 장관들이 대부분 사퇴했다. 제1부통령 디나 볼루아르테도 대통령과 결별했다. 헌법재판소와 함께 카스티요의 포고령을 대통령 탄핵 과정을 방해하려는 '쿠데타'로 규정, 발표했다. 같은 날 페루 국회는 대통령 탄핵 소추안 표결을 예정대로 강행, 101 대 6으로 가결했다. 놀랍게도 집권 자유 페루당 의원들도 대부분 찬성, 가결 기준(87석)을 훨씬 넘겼다.
페루를 '거울'로 본 한국의 쿠데타 이후
윤석열 정부 각료들은 1달이 넘도록 아무도 사퇴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 고위공무원들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빈 대통령실을 지키고 있다. 페루의 부통령 격인 국정 2인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비상계엄를 저지하기는커녕 들러리를 섰다. 집권여당 의원들이 위법적 비상조치를 선언한 대통령과 단호하게 결별한 것도 여전히 대통령을 두둔하는 국민의힘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한덕수 총리는 헌법상 어떤 근거도 없이 여당과 공동 국정운영 구상을 발표하는 막간극을 벌였다. 비상계엄 11일 만인 지난달 14일 국회의 윤석열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됐지만,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13일 만에 역시 직무정지에 들어갔다. 페루에선 탄핵안 가결 뒤 볼루아르테가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카스티요는 곧바로 축출됐다. 7일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카스티요가 '국민의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셀프 쿠데타 뒤 25개월째 구금돼 있다. 국회 해산과 포고령 통치를 시도한 반란 및 음모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카스티요의 셀프 쿠데타는 추진 의도가 비슷할 뿐 형식과 내용에서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와 비교 대상이 못 된다.
카스티요처럼 야당의 대통령 탄핵 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4.13총선이 부정선거였다면서 중앙선관위에까지 계엄군을 보낸 윤석열에 비해 카스티요의 죄질은 외려 가볍다. 정치적 배경도 극과 극이다. "학생들이 굶은 채 학교에 오는 것을 보고 정치를 시작하게 됐다"는 교사노조 위원장 출신 카스티요와 검찰총장 출신으로 신데렐라처럼 정치에 등장한 윤석열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볼루아르테는 민첩하게 기득권 계층과 기성언론, 군부의 지지를 얻어 집권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국회에선 소속 자유 페루와 결별하고 보수정당들과 연계하고 있다. 카스티요 지지자들의 항의 시위에 군경을 투입해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한국은 어쨌든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처리와 내란혐의 수사가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3일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한국 상황에 비춰보면 적어도 카스티요 체포 및 구금, 수사 과정에서 "내란 수사가 내란(윤석열)"이라는 황당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페루 대통령궁에는 '경호처장 박종준'이 없었다. 체포 과정에 대통령 경호원들이 결사 저항했다는 말도 없다.
페루 대통령궁엔 그때나 지금이나 '박종준'이 없다
'탄핵 이후'의 페루와 한국은 섣부르게 비교하기 어렵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태도도 단호하다. 지난해 3월 페루 검찰이 전광석화처럼 실행한 대통령 관저 및 집무실 압수수색과 현직 대통령 소환 조사가 대통령 부인 김건희의 디올백 사건과 극명하게 대비돼 소개된 바 있다.
작년 3월 14일 대통령 볼루아르테의 명품 롤렉스 시계 구입에 의혹을 제기한 라엔셀로나의 보도 뒤 페루 검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 같은 달 30일 자택과 집무실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4월 5일 대통령 소환 조사까지 2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페루 독립언론과 정부로부터 독립된 검찰의 협업이 빛났다.
윤석열은 비상계엄 선포 뒤 "총을 쏘거나, 도끼로 (국회 본회의장)문을 부수고 들어가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관저에 자정 무렵 들이닥친 페루 검찰은 현관문을 열지 않자 곧바로 해머로 부순 뒤 진입했다. 대통령 가족은 채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영장 집행을 지켜봤다. 페루 대통령이라고 왜 경호 무력이 없었겠나. 그러나 "영장 집행을 방해하면 반역행위다"라는 검찰의 일갈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일개 경호처장이 사법당국의 수차례 압수수색 영장에 이어 체포 영장 집행까지 막고 있는 한국과 천지 차이다.
세계 주요 언론이 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이 대통령 관저에서 경호처와 3시간 30분 동안 철수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과 달리 페루 언론은 거의 침묵했다. 지구촌 '천태만상' 정도로 보았을까? 실제 라엔셀로나는 여러 뉴스의 하나로 다뤘다.
볼루아르테의 페루는 지난해 11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브라질과 함께 친위 쿠데타를 앞둔 윤석열의 마지막 순방국이었다.
윤석열 체포 불발 뒤엔…나라 말아 먹는 최상목의 '부작위' (3) | 2025.01.05 |
---|---|
최상목 임시내각 속 '지정 생존자' 고민할 시간 (2) | 2025.01.02 |
검란, 군란 이은 '관료의 난' 무안 참사 핑계로 혼란 이어가나 (4) | 2025.01.02 |
[12.3 내란 인물열전] '도로 보안사' 사령관 여인형 (6) | 2024.12.26 |
최규하의 길, 한덕수의 길 (0) | 2024.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