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과 달리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정책을 바꿀 건가?) 말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몰두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변화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취약함을 느끼고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는 사치를 누릴 수 없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지난 3일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직업 외교관으로 일한 40여 년 동안 주로 다자외교를 했던 장관의 말이다. 양자외교가 국가 간의 정무적인 사안을 다룬다면 다자외교는 글로벌 이슈가 초점이다. 2023년 10월부터 계속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글로벌 이슈의 하나. 조 장관은 우리 사정 탓에 정책 변경은커녕 살펴볼 여유조차 없다고 말했다.
2025년 현재 193개 유엔 회원국 가운데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을 한 나라는 147개국. 이를 외면해 온 프랑스와 캐나다, 영국, 포르투갈 등 미국의 동맹국들도 최근 국가 승인 방침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과 노선을 보조를 맞췄던 서방 국가들이 뒤늦게 정책을 바꾸는 것은 팔레스타인 주민 6만여 명의 학살에도 인도적 재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두 개의 국가 해법을 지지하기 위한 것.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승인이 평화를 위해 필수적인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문제는 오는 9월 유엔 총회에서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주유엔대사와 외교부 내에서 다자외교를 총괄하는 2차관을 거친 장관이 중요한 글로벌 이슈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인터뷰를 진행한 WP 이샨 사로르 기자는 질문에서 한국이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을 국가 승인하지 않고 있는 아시아에서 몇 안 되는 '국외자(outliers)'임을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이 자발적으로 예외가 된 나라들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눈치를 살피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난 31일 캐나다에 미국·멕시코·캐나다(USMCA) 무역협정 (FTA) 비적용 품목에 35%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서 캐나다의 팔레스타인 승인 방침을 문제 삼았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그러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고백건대 기자는 WP 인터뷰 기사를 읽고도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6일 '한미 안보협상과 동맹 현대화의 쟁점과 과제'를 주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긴급토론회 중 이혜정 중앙대 교수의 통찰을 접한 뒤에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 글은 "한국 언론이 이 부분을 다 놓쳤다"는 이 교수의 날카로운 질책에 뒤늦게 조 장관의 인터뷰 발언을 톺아 보는 작업임을 밝혀둔다. 조 장관의 팔레스타인 발언에 대해 이 교수는 세미나에서 "국제정치학자로서 너무 실망했고, 외교적으로 너무 잘못한 발언이다. (말대로라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외교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취임 뒤 첫 인터뷰 상대로 미국 신문을 선택했다. 미국 여론을 중시하는 의중이 엿보였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팔레스타인 실언'을 제외하면 아리송한 외교적 수사가 대부분이었다. '대미 협상에서 이재명 정부가 설정한 금지선(red lines)이 있었나, 또 그러한 금지선을 양보했나'라는 질문은 "소시지 만드는 과정을 보지 말고 소시지를 즐기는 게 더 낫다"라는 말로 넘겼다. 위트도 있었다. '북러 협력의 확대, 최근 10년 래 정치적으로 가장 취약한 이시바 시게루 일본 내각, 중국이 제기하는 도전들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냐'는 질문에 "난기류에 들어가니 좌석벨트를 조이시라"는 여객기 기장의 안내방송을 상기시키면서 답변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한국이 몰두하고 있다는 동북아 안보 문제와 관련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지는 오리무중이다. 조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취임 뒤 끊임없이 제기되는 주한미군 감축설에 대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라면서 엉뚱한 근거를 제시했다. "이번(방미 기간)에 만난 여러 상원의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 조 장관은 지난 31일 로저 워커 상원 군사위원장(공화·미시시피)과 짐 리쉬 상원 외교위원장(공화·아이다호) 등을 만났다. 그러나 같은 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한미 첫 외교장관 회담도 있었다.
질문자는 물론 국내 독자들은 조 장관의 '생각'이나 상원의원들의 말보다 한미 외교라인 간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정부가 어떤 방침을 세워놓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을 터. 조 장관이 일절 언급하지 않은 대목이다. 그나마 정부 입장을 비교적 분명히 밝힌 중국 관련 발언이 생뚱맞은 '잡음'을 일으켰다.
그는 "동북아시아에서 우리는 (북러 협력 외에) 중국이 이웃 국가들과 다소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라면서 중국이 남중국해와 황해(서해)에서 벌이고 있는 영유권 문제를 에둘러 지적했다. "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도전에 다소 경각심을 갖게 됐다"고도 했다. 이어 "우리는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중국이 양자 문제뿐 아니라 지역 문제에서도 국제법을 준수하는 것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지적한 발언이 왜 문제가 됐을까.
주한 중국대사관이 조 장관의 발언을 반박하는 입장문을 내놓자, 대통령실은 5일 "(조 장관의 발언은) 한중 간 일부 사안에 이견이 있더라도 민생 및 역내 안정과 번영에 기여하는 한중 관계를 만들기 위해 지속 노력하겠다는 취지의 언급"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중국 측 입장문은 "중국은 유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기초로 한 국제관계의 기본 규범을 일관되게 확고히 수호해 왔다"고 강조했다. "현재 중국은 주변국들과 모두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절대다수 주변국도 중국과의 우호 협력 강화를 외교의 우선 방향으로 삼고 있다"는 취지였다.
이 교수는 "조 장관의 중국 관련 언급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면서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대목에 있다"고 짚었다. 동맹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내놓지 못한 점을 꼬집은 것. "위성락 안보실장을 비롯해 안보라인을 외교부의 전통적인 동맹파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친중반미 혐의를 받는 이재명 정부의 고민이 엿보였다"고 지적했다. "조 장관 인터뷰에서 미국이 무슨 짓을 하건, 문제 제기하지 않겠다는 위선이 읽혔다"는 촌평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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