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회원국들, 심지어 독일까지 방위비로 국내총생산(GDP)의 5%를 지출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북한뿐 아니라 공산주의 중국으로부터 훨씬 더 끔찍한 위협에 직면한 아시아의 핵심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은 훨씬 덜 지출하고 있다." (5월 31일. 헤그세스 샹그릴라 대화 연설)
"미국 방위산업을 되살리는 한편 강력한 국방예산을 확보하고, 동맹국들이 국방예산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큰 그림 속에서 이스라엘과 인도, 한국, 폴란드와 같은 동맹도 있다. 그들은 진정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다." (3월 4일, 콜비 인준청문회 사전 답변)
미국 고위당국자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는 국내 언론→이에 살을 보태는 전문가 집단→외교·국방 관료들의 '무난한' 협상→국민의 어깨 위에 더해지는 부담. 익숙한 경로다. 많은 경우 언론·전문가·관료 집단이 암묵적으로 협업한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지난 31일 샹그릴라 안보 대화 연설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방위비 인상을 촉구하자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를 대한민국에 대한 압박으로 해석한다. 한 대학교수는 "GDP의 5%로 국방예산을 올리라는 건 사실상 한국을 가리킨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 지역 동맹인 건 맞다. 그러나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이 지난 3월 4일 상원 인준청문회 사전 답변서에서 한 주장과 배치된다.
대만 GDP 10%, 일본 3% 촉구
콜비 차관은 미국의 전 세계 동맹국 중 이스라엘과 인도, 한국, 폴란드 등 4개국을 콕 집어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평가했다. 국방예산과 관련, 미국이 아시아 동맹-파트너국 가운데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나라는 한국이 아니다. 대만과 일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숙제를 나눠주듯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GDP 5%, 대만은 10%를 언급했다. 콜비는 여기에 일본을 추가했다. 그는 "미국은 핵무기를 현대화하는 한편 제1 도련선 방어를 위해 재래식 전력을 개선해야 한다. 동맹, 특히 일본과 대만이 국방력을 대폭 늘리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이미 2027년까지 방위비를 GDP 2%로 끌어올리는 5개년 계획을 이행하고 있다. 콜비는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라면서 "하루빨리 3% 이상으로 끌어올려 일본 열도에 대한 '거부 방어(denial defense)'와 지역 집단 방어에 초점을 둔 군 개편 작업을 가속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본의 올해 방위예산은 GDP 1.8%.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대선 유세 과정에서부터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100억 달러(약 13조 원, 현재 1조 5192억 원)로 올리겠다고 장담했지만 국방예산을 지목하지 않았다.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은 변죽을 울리다가 엉뚱한 요구를 들이밀기도 한다. 그러나 국방예산의 셈법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직면한 위협의 정도와 적절한 대비에 필요한 금액을 산정하는 작업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장이 높아진 곳 역시 한반도가 아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 4월 상원 청문회에서 "김정은이 남침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증언했다. 미국 국방 관료들은 대만해협의 위기를 긴박한 위협으로 거듭 지적하고 있다.
콜비 인준청문회에서 국방비 관련해 초점이 집중된 국가는 작년 12월 야당의 반대로 국방예산 증액이 무산된 대만이었다. 민진당 정부가 대만 입법원(국회)에 제출한 2025년 예산안을 놓고 국민당과 민중당이 제동을 걸어 6.6%를 삭감하면서 국방비 인상률도 꺾였다. 그 결과 올해 대만의 국방비는 1.76% 수준. 콜비는 "(제임스)매티스 장관이 말했듯이 우리는 당신보다 더 당신의 방위에 신경 쓸 수 없다.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만에 얼굴을 맞대고 정책 권고를 할 때마다 한국처럼 하도록 종용했다. 한국은 매우 타당한 모델이다. 군사문제에 더 진지하다"고 말했다.
헤그세스가 상찬한 독일의 국방예산은 1%대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GDP 2%를 처음 넘었다. 올해는 2.12%(985억 달러). 우크라이나 전쟁 전인 2021년 1.4%에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은 추정 방식에 따라 올해 2.6~2.8% 정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1조 5192억 원)을 더하면 더 올라간다. 단순 수치로 독일과 한국을 수평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콜비가 청문회에서 강조했듯이 냉전 당시 인구와 영토가 대략 현재의 3분의 2 정도였던 서독이 지상군 12개 사단을 운용했지만, 지금은 1개 사단의 동원 여부도 확실치 않다. 지난 30여 년간 꾸준히 전력을 증강해 온 한국과 이제 막 올리기 시작한 독일은 궤적이 다르다.
되레 중국에 국방비 인상 동기부여
헤그세스의 아시아 안보대화 기조연설이 미·중 대화로 연결되기는커녕 강한 반발을 사고 있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중국 외교부는 1일 "지역 국가들의 평화와 발전 의지를 무시한 채 진영 대결을 선동하고 중국 위협론을 부각한 도발적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국방부도 대변인 성명에서 "뿌리 깊은 헤게모니 논리와 강압적 태도, 냉전적 사고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 국방부장이 샹그릴라 대화에 사상 처음 불참, 양국 간 고위급 대화는 성사되지 않았다.
올해 국방예산이 대부분 1% 대인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과 우방국들도 침묵했다. 필리핀(GDP 1.25%), 태국(1.3%), 호주(1.9%), 뉴질랜드(2.0%) 등이 국방비를 5%로 올리려면 정치적 모험을 해야 할 판이다. 역설적으로 헤그세스가 촉구한 국방비 증액은 중국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자국은 물론 동맹과 우방의 국방비를 계속 올리면, 올해 국방비가 GDP 1.5%에 불과한 중국 역시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8월 말 확정될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전략(NDS)의 윤곽은 국방의 우선순위를 본토 방위와 중국 견제, 동맹과 우방의 역할 증대 등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미국 핵무기의 현대화 △인도·태평양 지역 등에서의 재래식 전력 증강, △방위산업 기반 복원 등 세 가지를 강조한다. 트럼프에서 시작해 헤그세스 장관, 콜비 차관까지 아래로 내려가면서 일관되게 내보내는 메시지다. 군더더기가 많은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걷어내고 순수 군사전략 측면에서 미국이 한국 새 정부에 갖고 있는 불안 요소는 한미동맹 자체가 아니다. 한미일 군사협력의 지속성과 주한미군의 재배치 또는 역할 조정 등 두 가지로 압축된다.
국내 일각에서 지레 국방예산 증가 압력을 걱정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주고, 그 대가로 국방비 인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 국군은 이미 재래식 전쟁에서 대북 억제 능력을 확보해 놓았다.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공약이 믿음직하다면 얼마든지 자주국방을 할 수 있다. 콜비 역시 저서 '거부 전략'에서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북한의 재래식 남침을 거의 확실하게 홀로 격퇴할 수 있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핵우산 공약의 신뢰성은 미국이 답할 대목이다. 미국이 서울이나 도쿄보다 워싱턴이나 뉴욕을 먼저 지킬 것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3차 세계대전을 전제로 한 가정이다.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건드리기보다 펜타곤 안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는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가 부담이 적다. 전략적 유연성과 동전의 양면인 전작권 반환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혀 다른 셈법으로 톺아봐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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