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 국회의사당에서 연설을 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국회 연단에 서는 6번째 대통령이며, 연설로는 7번째이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이번 아시아 순방 일정 중에 베트남 다낭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연설과 함께 ‘두 개의 주요 연설’이라고 소개했다.
일단 연단에 서면 통상적인 외교관례와 달리 장광설을 퍼붓는 연설 스타일로 비추어 여느 미국 대통령의 연설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북한 발 핵·미사일 위협과 미국 발 ‘군사적 해법’ 위협 탓에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로 이른 만큼 무난한 연설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트럼프의 국회연설에서는 국제사회가 대북 압박을 최대화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길 것이라는 것이 지난 달 31일 백악관 고위관계자가 전화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문제도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색깔의 연설을 내놓을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미 관계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보면 그 역시 한 장(章)을 차지할 뿐이다. 어떤 미국 대통령도 한국 국회에서 언급하는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키워드는 방위공약과 주한미군 유지, 북한의 도발과 핵문제,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교역 등이다.
1960년 6월20일 서울 태평로 의사당에서 연설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국회기록보존소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연설에 북한의 위협에 맞서 방위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빼놓지 않았다. 1952년 12월 초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아이크·공화)는 두차례 임기 마지막해인 1960년 6월20일 국회 연단에 섰다.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한국전쟁 중에 치른 첫 대선 유세 전략을 ‘K1C2(한국전쟁·공산주의·부패’로 잡을 만큼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은 인물이다.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지 못했다면서 해리 트루먼의 민주당 행정부를 집중 공격한 것이 주효해 대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러나 국회 연설에서는 ‘핵’을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행정부와 미국민들 대신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명시된 약속대로 (유사시)한국을 전폭 지지할 것을 엄숙히 재확인한다”는 다짐에 그쳤다. “여러분은 우방과 동맹국들과 함께 ‘자유한국’의 국경선을 넘는 어떤 침범도 허용하지 않을 한국군의 능력을 믿어도 좋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전 도중인 1966년 11월 초 방한한 린든 존슨(민주)은 한국전쟁에서 5만3625명의 미국인과 대략 200만명의 한국인이 숨졌음을 상기시키면서 양국 간 혈맹이 “1950년 한국에서, 지금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의)공격을 막고 있다”고 역설했다. 한·일 국교 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3년 11월 방한 한 로널드 레이건(공화)은 소련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 및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테러를 비난하고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30돌임을 강조하면서 한국 방위 의지를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위 공약은 주한미군의 현상유지와 직결됐다. 1978년 4월 지미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감축을 발표한 이후 한국내에서 지속된 추가 철군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한 약속이었다.
조지 HW 부시(공화)는 1989년 2월27일 첫번째 국회연설에서 “주한미군을 감축할 계획이 없다. 우리 병사들은 북한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한국의 요청에 따라 주둔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주한미군의 유지와 상호방위조약 준수를 다짐했다. 1992년 1월 연설에서는 자신의 한반도 전술핵 철수 및 남북 간 ‘한반도 비핵화 선언’ 덕에 평화의 기운이 높아지는 데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한국군의 쿠웨이트 침공작전(사막의 폭풍) 참전에 대한 사의도 표했다. 다음 해 국회 본회의장을 찾은 빌 클린턴(민주)도 “우리는 미군 철수를 동결하고 한국군 및 주한미군을 현대화하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미국의 핵심 이해가 있는 만큼 한국민이 원하고 필요해 하는 한 미군이 주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북핵 문제
북핵 문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부시의 두번째 연설 부터다. 부시는 “북한의 핵무기 추구가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가장 심각한 단일 위험”이라면서 연설 1주일 전(1991년 12월31일) 남북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을 촉구했다. 하지만 “종이는 평화를 담보하지 못한다”면서 북한의 국제에너지기구(IAEA) 전면사찰 수용을 압박했다. 한·미 합훈(팀스피리트)을 취소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면서 조성됐던 낙관적이던 분위기는 다음해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탓에 다시 벼랑 끝에 섰다.
넉달 뒤 국회 연단에 선 클린턴은 위기에 처한 NPT 체제의 수호를 다짐하며 북한에 대해 IAEA의 모든 안전의무를 이행하고 특별사찰을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대화와 반목, 진전과 후퇴, 기아중립 상태가 갈마들면서 악화된 북핵 문제는 24년 뒤,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뛰어넘는 가장 심각한 국제이슈로 집중 부각됐다.
한·미 동맹의 역사가 64년 됐지만, 한반도 분단에 절반의 책임이 있는 미국은 여전히 한반도 통일 정책을 갖지 않고 있다. 탈 냉전 뒤에도 방치된 문제다. 1990년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계기로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없는 방식의 파괴(CVID)’이 정책으로 제시됐지만, 정작 통일정책은 지금까지도 없다. ‘입장’이 있을 뿐이다. 국회연설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밝힌 미국 대통령은 두 명이다.
부시는 1989·1992년의 두 차례 연설에서 모두 “미국민은 한국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 하에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는 당신들의 목표를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빌 클린턴 역시 “한국의 인위적인 분단은 언젠가 끝날 것”이라면서 “우리는 한국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국회연설에서 한국전쟁에서 피를 나눈 혈맹관계와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분단의 비애에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민이 열망하는 통일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한·미관계의 오랜 패러독스다.
한·미 간 무역불균형을 거론한 것은 1989년 부시가 처음이다. 아이젠하워와 존슨 등 이전 대통령들은 한국의 재건과 ‘한강의 기적’을 칭송하는데 그쳤다. 레이건은 1983년 연설에서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25년 동안 제공한 55억달러의 경제원조는 한·미 간 6개월치 교역액도 되지 못한다”면서 “교역은 사실상 균형을 이뤘다”고 만족을 표했다.
하지만 6년 뒤 부시는 국회연설의 상당부분을 무역불균형 해소에 할애했다. 단임(4년) 임기 내내 경제부진으로 고전했던 그는 “솔직하게 말해 여러분이 나로부터 직접 이 말을 들었으면 한다”면서 “우리가 양국관계를 더욱 강하게 발전시키려면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부시는 3년 뒤 국회연설에서 다시 통상문제를 거론했다. 하지만 “지난번 방한 이후 양국 간 무역 불균형 액수가 90억달러에서 10억달러로 줄어든 것이 기쁘다”면서 특히 “미국의 대 한국 수출액이 지난 2년 간 7% 이상 늘어났다”고 만족해 했다. 그러나 “(경기침체기에) 나의 최우선순위는 일자리와 경제의 성장”이라면서 막바지에 다다른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의 성공적인 매듭을 제안했다. 트럼프가 이번 국회연설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을 포함한 무역불균형 문제를 거론한다면 부시 이후 25년 만의 공개적인 통상 압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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