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북한 문제를 다뤄왔지만, 이번 방북에서처럼 재앙의 위협을 접한 적은 없었다.”
노련한 언론인 역시 개인적 경험과 느낌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일까. 지난 달 말 북한을 12년 만에 방문했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방북기가 연휴 동안 한국 사회 일각에서 조용한 주목을 받았다. 지난 10월8일자(현지시간) 뉴욕타임스 일요판에 소개된 그의 방북기는 ‘북한 내부에서 전쟁의 북소리를 감지하다(Inside North Korea, and Feeling the Drums of War)’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평양이 온통 핵전쟁 전야의 분위기였음을 강조했다. 긴장이 고조돼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에게 특히 불안감을 갖게 했을까.
크리스토프는 우선 북한 외무성 고위당국자들은 물론, 평양 거리에서 만난 고등학생부터 다양한 직업인들에 이르기까지 단 한명도 예외없이 미국과의 핵전쟁이 임박했으며, 미국은 재로 변하겠지만 북한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가 인터뷰한 최강일 외무성 북미국 부국장은 “한반도는 핵전쟁 발발 전야”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서로 욕하면서 배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일 뜬금 없이 ‘폭풍 직전’이라고 말한 것과 겹친다.)
‘셀수 없이 많은’ 탈북민과 인터뷰했다는 크리스토프는 노인세대와 북·중 접경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주민들은 대부분 북한이 미국과의 핵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당국의 발표를 실제로 믿는다고 짚었다. 두번째는 호텔에 머물렀던 2005년 방북 때와 달리 이번에는 고방산 초대소에 묶으면서 북한 외무성 관리들의 철저한 감시 또는 보호를 받았다는 점을 들었다. 군부나 보위부 강경파들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하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북한군 고위 장성들이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북한에 수감된 미국인 3명과의 면담도 불발됐다고 전했다. 최강일과 리용필 외무성 미국연구원 부원장은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사망과 관련해 미국쪽에 책임을 떠넘겼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제재를 포기하고 적대적 태도를 접으라고 주장한다. 미국 역시 북한이 먼저 모든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라며 각각 ‘비현실적 요구’를 하고 있다. 크리스토프는 양측이 서로 약하게 보이지 않도록 군사적 엄포를 놓고 있지만, 기실 평화적 해결을 선호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갈등을 개인감정화하고 확대시키는 것을 즉각 중단하고, 조건 없는 대화에 착수하며, 북한의 유엔 회원국 자격박탈을 걸고서라도 인권문제 아젠다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외부 정보를 담은)USB 반입 단체를 지지하고, 미국이 이미 착수한 대북 사이버전을 강화하며, 타당한 결과를 도출하도록 대북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6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북핵 해법을 조금이라도 고민해보았다면, 서로 상충되거나 현실성이 없으며, 희망사항을 나열한데 지나지 않음을 간파할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최선책은 배핵화의 장기적 목표를 유지하되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발사 중단과 한·미 합훈 중단을 교환하는, ‘동결 대 동결’의 잠정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썼다. 그게 안되면 차선책으로 (핵전력 간)상호 억지(mutual deterrence)를 시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론은? 비관이다. “불행히도 북한과 미국 모두 이러한 접근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북한이 기획한 미국 주요언론 기자들의 방북
이쯤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토프를 비롯한 뉴욕타임스 기자 일행 4명의 방북은 북한 당국이 기획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도 지난달 25일자 ‘평양으로부터의 편지’라는 방북기를 현지 분위기 전달을 중심으로 보도한 바 있다. 미국 국무부는 웜비어 사건 이후 미국민의 북한방문을 최근 금지시켰지만 자국 기자들에게 특별 단수여권을 발급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프로파갠다에 능하다. 실제로 북한 당국자들은 미국 기자들에게 자신들의 전쟁능력과 제재 내구력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북한이 정말 자신이 있다면, 굳이 미국 기자들을 동원해 능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자체가 자신감의 부족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 또는 희망적 사고가 고개를 든다.
■한반도 거주민에겐 지독히 불편한 결론
수십년 분쟁 현장을 누벼온 그에게도 이번 상황은 녹록지 않았는지, 아니면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좌절이 깊어서인지 이번엔 맥없는 논조에 그쳤다. (그는 지난해 미국 대선 직전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다면 우리 안에 또 다른 김정은을 갖게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다만, 이번 방북은 오토 웜비어의 죽음이 던진 충격에 더해 이를 발뺌하는 북한의 태도에 더욱 움츠러든 여정이었음이 감지된다. 크리스토프와 함께 간 뉴욕타임스 필진 캐럴 지아코모의 방북기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잡힌다. 북한의 호전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음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 독자들을 위한 방북기다.
그럼에도 크리스토프가 전한 불길함은 여운을 남긴다. 같은 날짜, 같은 지면에 실린 소설가 한강의 기고문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가 한국민의 정서를 내보였다면 크리스토프의 글은 미국 여론주도층의 좌절을 담고 있다. 일부 국내 핵무장론자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북핵에만 인질이 된 게 아니다. 백악관 집무실 탁자 위에 놓인 모든 옵션에도 인질이 됐다. 청와대 탁자 위에는 어떤 옵션이 놓여 있을까. 한·미가 쥐고 있는 옵션들의 ‘최대 공약수’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북핵의 완전한 파괴에는 지상군 침공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미국 합참 (0) | 2017.11.07 |
---|---|
존 델러리 "민주주의 교훈 보여준 촛불혁명, 이젠 '한반도 평화'의 교훈 보여줄 때" (0) | 2017.11.02 |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 한강, NYT 기고 잔잔한 파문 (1) | 2017.10.09 |
한강의 기고문이 드러낸 '불편한 진실', NYT독자들은 어떻게 읽었나 (0) | 2017.10.09 |
[김진호의 세계읽기]북한 발 핵재앙의 과학적 분석2-허술한 지휘-통제 시스템은 '재앙의 보증수표' (1) | 2017.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