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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의 불'이 된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재협상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5. 5. 2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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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그것(it)'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respects)한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19일 미국 워싱턴의 미 국무부 청사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한미 전략대화를 갖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6.1.19. 연합뉴스

사라진 '한국민의 우려'

한미가 2006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합의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양국 간 공동성명, 제2항이다.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합의 주역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주한미군의 역할과 관련해 잇달아 내놓는 발언을 계기로 새삼 들춰 본 문서다.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에 대해 한국과 한국민이 이해하는 궤를 벗어난 발언들이었다.

합의문의 제1항은 한국이 주어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글로벌 군사전략 변화의 이유(rationale)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를 존중한다." '그것'이 주한미군이냐, 한국이냐에 대해 국내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주한미군이 중국을 공격하는 데 중국이 그 배후 기지를 공격하지 않을 리 없을 터. 주한미군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포함된다면 한국이 필연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와 지금의 동북아 안보 상황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질 수 없다. 미국과의 전략적 유연성 논의를 이끌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국민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2005년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연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을 찾아 사저 앞 만남의 광장에 모인 수많은 방문객들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08.10.8. 노무현재단

'일개 사령관'의 도넘는 발언

브런슨 사령관의 발언이 놀라운 것은 무엇보다 양국 정부 간 합의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어서다. 그는 주한미군이 대북 억제력과 함께 "동해에서 러시아를 억제하고, 서해에서 중국을 억제할 잠재력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한국 새 대통령이 6월 4일부터 자신이 대응해야 할 '일종의 동맹(한미일 협력)'이 기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말은 일개 사령관의 위치를 명백하게 벗어난 것. 미국 상원 군사위 청문회 발언(4.10)과 디펜스뉴스 인터뷰(5.13), 미국 육군협회 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 연설문(5.15) 어디를 보아도 '한국민의 우려'는 없었다. '한국의 입장'은 더더욱 없었다. 19년 전 한미 합의문은 국회 비준을 거친 조약이 아니다. 그러나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에 관해 한미 양국이 유일하게 합의한 문건이다. 어떤 변화도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게 상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54년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들먹이면서 주한미군이 중국과 러시아를 쫓아 뛰어다닐 수 있다고 자신한다는 점이다. 상원 청문회에선 조약에 '적'이 명시돼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양국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직면해 상호 원조를 제공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디펜스뉴스 인터뷰에선 "나의 임무는 상호방위조약의 '엄격한 기준(stricture)'을 맞추는 것"이라며 "우리는 해야 할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단언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15일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 육군협회 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25.5.15. [미 육군 누리집] 시민언론 민들레

대만 위기, 한미 상호방위조약 범위 밖

그의 말대로 조약문의 '엄격한 기준'을 따져보아도 말이 안 된다. 러시아와 중국이 동, 서해에서 위협을 제기한다고 치자.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적 독립이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약을 발동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는 중국을 '적'으로 규정하며 적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대만과 대만해협은 미국이나 한국의 행정 관할이 아니다. 중국이 침공하더라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대상이 못 된다. 한국에 정중히 지원을 요청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양안 전쟁이 벌어지면 한국군이나 주한미군은 대북 억제력을 보강하는 게 먼저다.

양안 전쟁은 기본적으로 해, 공군이 중심이지만 주한미군은 단 1척의 함정도 보유하지 않고 있다. 미공군 전투기가 동원될 수 있지만 그야말로 한반도 안보에 심각한 공백을 초래할 사안인 만큼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해야 할 사안이다. '일개 사령관'이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브런슨은 한미 전략적 유연성 합의와 상호방위조약, 향후 필요한 한미 간 협의를 모두 건너뛰어 주한미군의 유연성 또는 자유 활동권을 강변한 격이다.

'브런슨의 지도.'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 15일 연설에서 강조한 동북아 지도. 한국과 일본, 필리핀을 대만해협 위기나 분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삼각형이라고 주장했다.

항공모함은 공격과 피격의 원점

작년 12월 대장 진급과 동시에 주한미군사령관에 임명된 브런슨의 의욕이 넘치는 것일까? 지난 15일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 육군협회 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서도 현란한 발언을 이어갔다. '지리의 기하학'과 '거리의 횡포(tyranny of distance)'를 운운하며 청중에게 동북아 지도를 왼쪽으로 눕혀 볼 것을 권했다. 동해가 위로 올라간 지도에서 정중앙의 한반도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떠 있는, 고정된 항공모함"에 비유했다. 최근 한화오션 조선소에서 미해군 '시저 차베스' 호가 말끔하게 수리된 것을 거론하며 한국의 조선 및 유지·보수·정비 역량도 주목했다.

주한미군은 중국 '제1도련선의 거품' 안에 있는 한편, 중국에 코 앞에서 본토 전쟁 부담을 주는 존재로 설명했다. 역으로 한국이 중국 코 앞에서 공격받을 부담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생략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군사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러중이 대응하고, 미국이 다시 이에 맞대응한다는 명목으로 동맹을 동원하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 러중 정상은 지난 9일 글로벌 전략적 안정 공동성명에서 이를 강조한 바 있다. 

브런슨은 '기하학'을 강조한 대목에서 한국-일본-필리핀 삼각형을 거론했다. 각각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으로 떼려도 뗄 수 없이 연결된 나라들이라며 "대만해협에서의 어떠한 위기나 분쟁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삼각형"이라고 잘라 말했다. 주한, 주일, 주필리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정도가 아니라 한국, 일본, 필리핀을 아울러 그 활용 방안을 제시한 셈이다. 한미 연합사(CFC) 사령관으로 "유사시 (한국군을 포함) 75만 명의 육군과 해군, 공군 및 해병대 병사를 책임진다"라고 강조하는 대목에서 주둔국 군대를 '자기 사람'으로 보는 미군 지휘부의 사고가 엿보인다.

지난 2010년 동해에서 열린 한미연합훈련에서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9만7천t급)와 한국 대형수송함 독도함 등 함정들이 대열을 형성, 기동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 태평양함대 전함들이 중-러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 2023.7.17. TASS 연합뉴스

트럼프가 예고하는 군사전략 '대수술'

LANPAC 심포지엄은 미육군 협회가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지상군의 중요성이 늘 중심 테마이다. '거리의 횡포'는 브런슨이 중장(1군단장) 계급장을 달고 참석한 작년 같은 심포지엄에서도 지상군의 강점을 설명하며 동원했던 개념. 지난달 상원 청문회에서는 주한미군 현 수준 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내놓은 발언들은 주한미군을 포함한 전체 미군의 체제 개편의 흐름 속에서도 읽을 필요가 있다.

"미국의 힘으로 '전쟁 없는 세계'를 구현하겠다"고 다짐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키워드는 '감축'이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2월부터 국방예산 매년 8% 감축과 함께 중동 및 유럽 주둔 미군사령부 감축, 미군 대장(44명)의 최소 20% 감축 등을 지시했다. 주한미군과 주한미군사령부는 일단 감축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새 국방전략에서 어떻게 정리될지 미지수다. 트럼프는 흥정용인지, 엄포용인지,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관세 폭탄과 한목에 협상(One Stop shopping)하겠다고 다짐, 혼란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지난 3월 30일 헤그세스 장관에게 △한반도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통합하자는 '하나의 전구(戰區, One Theater)' 제안을 생뚱맞게 내놓았다고 한다. 한반도를 포함하자면서 한국이 없는 자리에서 제안한 '무개념'이 놀랍거니와 자욱한 안개 속에 연막탄을 터뜨리는 꼴이다. 주한미군사령관에 더해 일본 방위상까지 한국군을 하나의 요소 또는 도구로 여기면서 제멋대로 '방위구상'을 끄적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9일 러시아의 2차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퍼레이드 뒤 각국 정상과 함께 모스크바 '무명 용사의 묘'에서 진행된 헌화식을 엄숙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2025.5.9. EPA 연합뉴스

"75만 병력이 내 책임"

제21대 대통령 선출을 앞둔 한반도 안팎의 안보 기상도는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돈의 연속이다. 새 정부가 할 일이 쌓여 있다. 브런슨의 잇단 발언은 그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가장 시급한 현안임을 거듭 일깨우는 자명종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은 잃는 게 더 많을 수 있다. 양국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데다가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한미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반드시 새로 작성할 때가 됐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 뒤 전략적 자율성 문제를 먼저 제기한 건 해외주둔미군재검토(GPR)의 맥락에서였다. 2008년 주한미군 규모가 2만 8500명으로 정해진 뒤에는 2만 2000명을 붙박이로 한반도에 두고, 6500명을 기동력을 갖춘 스트라이커 여단으로 운용해 온 배경이다. 지금도 9개월 단위로 순환배치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탈냉전 이후 군사전략에 더 큰 수술을 고민하고 있다. GPR 수준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 국가안보의 불확실성과 국민의 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브런슨은 3개의 모자를 쓰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과 한미 연합사(CFC) 사령관, 유엔사 사령관의 모자가 그것.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문제를 완결, 그 중 CFC 사령관 모자라도 벗겨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전작권 반환 문제는 시작부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논의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 갈수록 '선' 넘는 주한미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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