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루마니아 헌재의 선거무효 '부메랑' 더 커진 포퓰리즘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5. 5. 10. 19:29

본문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 포퓰리즘 후보가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깜짝 1위를 차지했다. 헌법재판소가 돌연 선거를 무효로 했다. "한 국가 행위자(a state actor)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세 지원을 한 것 같다"라는 정보기관 보고서가 유일한 근거. 중앙선관위는 해당 후보의 재출마를 금지시켰다. 5개월 뒤 치러진 재선거 1차 투표에서 다른 우파 포퓰리즘 후보가 또 1위에 올랐다. 득표율이 거의 두 배가 늘었다. 오는 18일 대선 결선투표를 앞둔 루마니아 이야기다.

4일 루마니아 대선 재선거 1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루마니아결속동맹당의 제오르제 시미온 후보(38)가 6일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미국 비즈니스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다. 2025.5.6. AP 연합뉴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악몽의 12월을 시작으로 지옥 같은 겨울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면, 루마니아 민주주의는 여전히 악몽 속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가 평소 같으면 흘려보냈을 루마니아 대선 소식이 새삼 주목되는 까닭이다.

루마니아가 지난 4일 대선 1차 투표를 다시 치렀다. 선거 결과 제오르제 시미온(38) 루마니아결속동맹(AUR) 대표가 득표율 40.96%로 1위를 기록, 20.99%를 얻은 무소속 니쿠쇼르 단 부쿠레슈티 시장과 오는 18일 결선투표를 치른다. 집권연정의 공동후보 크린 안토네스쿠와 무소속 빅토르 폰타 전 총리는 각각 20.7%, 13.04%를 얻어 탈락했다. 투표율은 작년 11월 24일 치른 대선 1차투표(52.56%)와 큰 차이가 없는 53.2%였다.

시미온 후보는 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스트로 분류되고, 단 후보는 친유럽 성향이다. 친유럽연합(EU)과 민족주의가 맞붙고, 기성 제도권 정당과 우파 포퓰리즘이 격돌하는 루마니아의 정치 지형은 결선투표 전망을 어렵게 한다. 기성 제도권의 루마니아헝가리계 민주동맹(UDMR)과 루마니아 구국당(USR)이 잇달아 단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미온은 11월 1차투표에서 1위를 했던 역시 민족주의 성향의 무소속 컬린 제오르제스쿠 후보의 지지를 받고 있다.

시미온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추종하는 후보로 지목되지만,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은 찾기 어렵다. 루마니아 대선에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동유럽 국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한국은 물론 집단 서방의 다른 나라 정치와 단순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집권 연정 사민당 소속의 마르첼 치올라쿠 총리가 5일 잇단 선거 패배에 총리직 사퇴를 발표하고 있다. 2025.5.5. 로이터 연합뉴스

루마니아의 정치적 혼란은 작년 11월 24일 대선 1차 투표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22.94%로 깜짝 1위를 차지하면서 시작됐다. 2위를 기록한 중도 USR의 라스코니 후보(19.18% 득표)와 12월 8일 결선투표에서 맞붙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이틀 앞두고 재외동포 투표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헌법재판소는 선거 무효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당초 부정선거 시비가 일자 재검표를 결정한 뒤 12월 2일 선거 결과를 확정했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제오르제스쿠의 틱톡 유세를 도왔다는 내용의 정보당국 보고서가 공개되자 나흘 뒤 선거 무효 결정을 내렸다.

정보 보고서는 제오르제스쿠가 틱톡 유세에서 '한 국가 행위자'의 협조하에 과도한 노출을 받으면서 유권자의 의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어떠한 확증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헌법재판관 10명은 만장일치 결정으로 "수많은 부정과 선거법 위반 탓에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의 본질을 왜곡하고, 선거 경쟁자들의 동등한 기회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루마니아 정부기관인 최고국방협의회는 2월 20일 "제오르제스쿠의 틱톡 유세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에서 시도한 소셜미디어 정보 조작과 비슷한 것 같다"고 뒤늦게 발표했다. 총을 먼저 쏘고 조준한 꼴. 이마저도 제오르제스쿠의 틱톡 유세에 자금을 댄 주체가 자유국민당(PNL)인 것으로 밝혀져 설득력을 잃었다. PNL은 친러시아와 거리가 먼 연정 참여 정당. 다른 극우 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제오르제스쿠의 유세를 지원한 것으로 관측된다.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의 작년 11월 대선 1차투표 무효 결정과 중앙선관위의 출마 불허 조치로 대선에 재출마하지 못한 무소속의 컬린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4일 제오르제 시미온 후보(왼쪽)와 함께 모고소아니아 선거구에서 투표하고 있다. 2025.5.4. AP 연합뉴스
컬린 제오르제스쿠 후보의 지지자가 대선 1차투표가 치러진 4일 부쿠레슈티의 루마니아결속동맹당 제오르제 시미온 대표의 선거사무실 밖에서 제오르제스쿠의 얼굴사진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서 있다. 2025.5.4. AP 연합뉴스

당국의 개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루마니아 경찰은 2월 26일 제오르제스쿠를 길거리에서 연행, 구금했다. 검찰은 헌법 질서에 반하는 선동과 선거자금 허위 신고, 파시스트와 인종주의 및 외국인 혐오 단체에 가입하거나 지지한 혐의 등을 걸었다. 60일간 언론 노출 금지령도 내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월 9일 어떠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제오르제스쿠의 재선거 출마를 금지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40%) 후보의 출마를 막은 것. 루마니아 항소법원은 헌재 결정에 대한 제오르제스쿠의 이의제기를 기각했다.

11월 1차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한 친유럽 중도 성향의 정치인 라스코니까지 나서 "선거 무효는 불법"이라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인 투표를 짓밟았다"고 비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해 가장 공격적인 라스코니는 성명에서 "루마니아가 크렘린 독재자의 조롱거리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됐다"라고 경고했다.

제오르제스쿠는 러시아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며 선거 무효는 '공식화된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선관위의 출마 금지 뒤에는 X 계정에 "민주주의 심장에 직접적으로 가한 타격"이라고 비난했다. 제오르제스쿠 지지 군중의 시위가 잇따른 것은 물론이다. 11월 1차 투표에서 13.86%을 득표해 4위에 그쳤던 시미온이 재선거에서 40%가 넘는 지지를 얻은 것은 제오르제스쿠의 지지 덕분이다.

이쯤 되면 국제사회의 심판자인 양 자유, 공정 선거를 강조해 온 유럽연합(EU)이 부정선거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했어야 마땅하다. '러시아의 개입' 의혹이 문제였다면 트럼프가 처음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결과도 무효화 해야 했다. 놀랍게도 루마니아 기성 권력과 서방은 친러시아 성향 후보를 배제한 헌재의 결정을 일제히 환영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8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2023년 EU 확장 패키지'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집행위는 이날 이사회에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위한 협상 개시를 권고했다. 2023.11.09. 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적전 분열을 경계하며 '선거 무효'라는 극단적인 반민주주의 처방을 두둔한 것.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헌재의 결정을 지지하며 "루마니아는 안전하고, 견고하며 친유럽 국가로 남아야 한다"면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안정적인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미국 국무부는 선거 무효화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투명한 선거 과정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러시아의 공작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루마니아 정부에 사이버 안보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EU 역시 루마니아 헌재의 결정을 환영했다. 자유, 공정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루마니아 정부에 외국의 간섭에 대항해 더욱 강한 안전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관할권 밖의 일이라며 개입을 거부했다.

11월 1차 투표 전까지 군소 후보였던 제오르제스쿠는 루마니아 제도권 언론에서 친러시아 성향 극우 포퓰리스트로 분류된다. 그는 틱톡 유세에서 특히 기성 정치권에 실망한 청년과 농부, 노동 계층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제오르제스쿠는 유세에서 △기성 정치권의 부패 △주요 산업 국유화 △성적소수자(LGBTQ) 불법화 및 기독교 정체성 강화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중단 및 중립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결선투표에 진출한 시미온의 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라스코니는 △세속정치와 △유럽통합 확대 △미국 및 서방과 연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에오간 머피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민주제도 및 인권 감시미션(ODIHR) 사무실 대표가 5일 전날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 1차 투표 과정을 평가하고 있다. 왼쪽은 루치에 포토코바 OSCE 조정관. 2025.5.5. EPA 연합뉴스

집권 연정의 사회민주당(PSD) 소속 마르첼 치올라쿠 총리는 11월 1차 투표에서 19.15%로 탈락한 뒤 이번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니콜라에 차우세스쿠의 공산주의 독재를 축출한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사민주의 후보가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치올라쿠 총리는 잇단 선거 패배의 책임을 자임하고 5일 전격 사퇴했다. 요하니스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 움직임이 본격화되던 지난 2월 사임, 일리에 볼로잔 상원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총리까지 사퇴함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루마니아 정정에 불안을 더한다.

시미온 역시 우파 포퓰리스트로 분류되지만,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지목된 제오르제스쿠에 비해 덜 위험한 인물로 평가된다. 해서 당선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러나 결선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루마니아 대선은 공산주의 청산 30여 년 만에 우파 포퓰리즘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민의를 배반한 사례로 기록되게 됐다. '악(惡)'을 배제한다면서 반민주주의라는 '거악(巨惡)'을 자초한 것.

영국 외교관 출신으로 워싱턴의 국제선거제도재단(IFES) 선임고문으로 있는 리처드 나쉬는 뉴욕타임스에 "루마니아 헌재는 헌법에 부여된 권한 안에서 판단했지만, 정치 관여라는 '회색지대'에 진입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선거 개입을 연구한 우크라이나 정치학자 안톤 셰코프소프는 "루마니아 헌재의 결정은 '잘못된 후보'의 1차 투표 승리를 못마땅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적어도 이번 사안에 관한 한 유럽 우파 포퓰리즘 지도자들의 지적이 타당성을 갖는다.

루마니아결속동맹당의 제오르제 시미온 후보(38)가 4일 대선 1차 투표 뒤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을 지지자들이 비디오로 지켜보고 있다. 2025.6.4. AP 연합뉴스

최근 파리 법원에 의해 피선거권이 박탈된 프랑스 우파 포퓰리즘 정당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은 4일 선거 결과 발표 뒤 "루마니아는 방금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EU 집행위원장)에게 아주 멋진 부메랑을 날렸다"고 꼬집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도 X 계정에 "루마니아 국민이 자신들의 머리와 가슴으로 마침내 자유롭게 투표했다. 브뤼셀(EU)의 주인들과 그들의 더러운 속임수에 대한 메시지였다. 브라보 시미온!"이라고 썼다. 살비니 부총리는 극우 정당 레가의 대표이다.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은 디아스포라(재외동포) 유권자의 60%가 시미온을 지지했다는 점. 인구 1900만 명인 루마니아는 헝가리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큰 디아스포라를 둔 나라로 꼽힌다. 이탈리아(110만 명), 스페인 및 영국(각 100만 명), 독일(80만 명), 미국(46만 명) 등에 500만 명을 웃도는 재외동포를 두고 있다. 루마니아-인사이더에 따르면 단 후보는 재외동포 표의 25%를 얻었다. 작년 12월 사흘간의 재외동포 투표 기간 중 이틀이 지난 상황에서 헌재의 선거 무효 결정으로 맛본 배반감이 표출된 게 아닌가 싶다. 18일 결선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헌재의 무리수는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오랫동안 검은 장막을 드리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우파 포퓰리즘 후보가 득세하는 것은 뿌리가 있다. 겉으론 우아하되 위선적인 기성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좌절과 실망, 분노를 반영한다. 제도권 언론과 기성 정계는 원인을 살피면서 성찰하는 대신 종종 편법을 동원한다. '극우'의 꼬리표를 붙여 배제를 시도하는 것. 그러나 원인을 외면한 처방이 먹힐 리 만무할 터. '트럼프의 미국'이 그렇듯 포퓰리즘은 더 커졌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루마니아 대선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이 14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밴스 부통령은 이 자리에서 "유럽의 최대 위험은 러이아나 중국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위험"이라면서 루마니아 대선 무효를 언급했다. 2025. 02. 14 [로이터=연합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