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발표문에도 굴곡이 있다. 같은 내용보단 다른 내용에 실제 통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고 국정을 잠시 책임진 이의 생각이 드러난다. 8일 권한대행 국무총리 한덕수(이하 대행)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대행은 "윈-윈(win-win)"을 말했다고 발표했고, 트럼프는 "원스톱 쇼핑(one stop shopping)"을 강조했다. 그런데 대행의 '윈-윈' 리스트와 트럼프의 쇼핑 리스트는 같지 않다. 대행은 조선·액화천연가스(LNG)·무역균형 등 3가지만 언급했지만, 트럼프의 리스트는 길었다. (한국의) 지속 불가능한 흑자와 관세, 조선, 미국산 LNG의 대규모 구매, 알래스카 가스관 합작 투자, 한국에 제공하는 군사보호 대가 지불 등을 나열했다. 이 모든 걸 한목에 '쇼핑'하라는 말이다. 차이는 또 있다.
평생 관료의 우회 화법과 포퓰리즘 대통령의 직설 화법의 차이다. 통화 내용을 전한 국무총리실 보도자료는 애매모호한 수사로 가득하지만, 트럼프가 X 계정(트루스 소셜)에 올린 글은 의미가 분명하다. 보도자료에는 트럼프의 글에 없는 "희망한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오지만, 놀랍게도 '관세'라는 단어가 없다. 지난 2일 한국에 대한 25% 상호관세 부과로 증시가 주저앉고 온 국민이 촉각을 기울이는 상황에 '관세'를 과감하게 지웠다. "조선, LNG 및 무역균형 등 3대 분야에서 미국 측과 한 차원 높은 협력 의지를 강조했다. 양측은 상호 윈-윈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무역균형을 포함한 경제협력 분야에서 장관급에서 건설적인 협의를 계속해 나가자"고 했다는 문장에 숨겼다.
보도자료 첫대목의 인사말을 제외하고 통화 내용은 달랑 4가지다. 이 중 3가지가 외교안보 내용이다. 경제 관련 문단은 단 한 개. 대행이 트럼프에게 전했다는 '희망'은 모두 안보 문제였다. 동상이몽 또는 희망적 사고가 묻어난다. 대행은 "미 신정부 하에서도 우리 외교·안보의 근간인 한미 동맹관계가 더욱 확대, 강화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또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등 심화되는 안보 위협 속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한미 양국과 국제사회의 의지가 북한의 핵 보유 의지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공조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한글로 쓴 건지, 영어를 한글로 옮겼는지 당최 헛갈리는 대목이다. "양측은 한미일 협력이 역내 평화와 안정, 번영에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고 한미일 협력을 지속 발전시켜 나가자"라는 게 총리실이 전한 외교안보 관련 세 번째 통화 내용이다.
통화 중 '한미 동맹'이 두 번 언급됐고 '북핵'과 '대북정책' '한미일 협력'이 거론됐다는 게 총리실 발표. 그런데 트럼프의 X 계정 글 어디에도 없는 단어들이다. '한미동맹'은 물론 '북한'도 없다. 실제로 통화 중에 관련 이야기가 거론됐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트럼프는 관심이 적었다는 뚜렷한 방증이다. 오죽 메아리가 없었으면 대행이 일방적으로 희망을 피력했겠는가. 외교안보 관련 트럼프의 유일한 언급은 "우리가 한국에 제공하는 막대한 군사적 보호비용 지불"뿐이다. 양측의 주파수가 맞지 않는 통화였다.
관세와 경제협력, 외교안보에 대한 트럼프의 속내는 이미 공개됐다. "한국은 '현금지급기(money machine)'이다. 주한미군방위비 분담금을 100억 달러로 올려야 한다. 관세와 비관세 장벽으로 미국을 벗겨 먹어온 (riffed off) 국가"라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했으면서도 제값을 받지 못했다는 게 트럼프의 셈법이다. 자신이 제시한 리스트를 한목에 쇼핑, 지갑을 열라는 거다.
그런데 하루, 이틀 상관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제21대 대통령이 탄생하기 56일 전, 대행은 대체 왜 트럼프와 통화를 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세계를 상대로 호통치고 있지만, 트럼프는 '위대한 거래'의 빠른 성사에 마음이 급하다. 미국 증시가 폭락하고 미국 경제의 전망이 급속히 흐려지는 가운데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보복관세로 정면충돌을 선택했고, 유럽연합(EU)는 조건부 '관세 0%'를 흘리면서 한편으로 보복 조치를 다짐하고 있다. 악수와 주먹을 동시에 내보이는 것(뉴욕타임스). 2024년 대미 수출액이 한국(1354억 달러)보다 많은 캐나다(4130억 달러)는 대놓고 EU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최소한 그런 모양새라도 보인다.
총리실은 이날 대행의 CNN 인터뷰를 소개하는 또 다른 보도자료를 냈다. 한국에 부과된 25% 상호관세가 "pity"라고 말해놓고 보도자료에는 '유감'이나 '애석한 일'이 아니라 '큰일'로 번역하는 창의성을 보였다. 대행은 "모든 일이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면서 "우리는 차분하게 25% 관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평가하고, 차분하게 협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CNN은 인터뷰를 '이 아시아 지도자는 트럼프의 관세 전쟁에 대해 중국과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소화했다.
트럼프의 사고에 한국은 가장 만만한 나라의 하나인 게 분명하다. 통화 뒤 백악관은 "일본과 한국의 협상팀이 오고 있고, 이탈리아 총리가 다음 주 워싱턴에 온다. 이스라엘은 '선제적인 접근'을 통해 미국과의 새 무역협정이 모두에게 모범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의 말본새는 원색적이다. 그는 이날 공화당 전국 의회 위원회 만찬 행사에서 "다른 나라들이 우리에게 전화하고 있다. "내 엉덩이에 입을 맞추면서(Kissing my a**)…"라고 말했다. CNN이 생생한 현장을 전했다. 트럼프의 상호관세의 발효 하루를 앞둔 8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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