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 마린 르펜이 31일 공금 유용 혐의로 5년간 피선거권 박탈 형을 선고받았다. 당장 2027년 대선 출마를 봉쇄한 것. 프랑스 안팎에서 '정치적 판결'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까닭이다.
정치적으로 르펜의 대척점에 선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 장뤼크 멜랑숑도 비난 대열에 합류한 게 주목된다. 흥미로운 현상은 프랑스 국내 정치 문제가 국경을 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과 크렘린궁을 필두로 이탈리아, 헝가리 등 각국의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일제히 판결을 비난했다. 크렘린궁을 제외하면, '포퓰리즘 대 사법제도'의 전선이 형성된 것.
르펜은 31일 파리 형사법원에서 유럽연합(EU) 예산을 유용한 혐의(공금횡령, 사기 공모)로 징역 4년에 벌금 10만 유로(1억 5000만 원) 및 5년간 피선거권 박탈 형을 선고받았다. 유럽의회 의원 시절(2004~2016) EU로부터 보좌진 임금 명목으로 받은 47만 4000유로(7억 원)을 국민연합(RN, 2018년까지 국민전선, FN) 당직자 임금으로 유용했다는 것. 징역기간 중 2년은 유예, 2년은 전자발찌 착용 가택연금이다.
'정치적 판결' 논란이 제기되는 쟁점은 피선거권 박탈이다. 법원이 르펜의 피선거권 5년간 박탈하는 형의 효력을 즉시 발효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요청에 따른 결정이라는 것 외에 법리상 근거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대선 결선투표에 두 차례 진출, 2017년 33.9%, 2022년 41.45%를 득표하고, 차기 대선 승리가 유력한 후보를 사법부가 주저앉힌 것. 르펜은 여론조사기관 IFOP이 31일 발표한 조사에서도 지지율 34~37%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르 주르날 뒤 디망슈(일요신문)'이 의뢰한 조사는 각 당 확정 후보에 따른 4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대선 1차 투표 지지 후보를 물었다. 2위는 에두아르 필립 전 총리(20~25%)였고, 가브리엘 아탈 현 총리가 3위(20%)였다. 필립과 아탈은 모두 집권 중도우파 정당 앙상블 소속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아탈을 밀고 있다.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UPE)의 멜랑숑은 12~13% 지지율로 뒤처졌다.
RN은 지난해 총선 1차 투표에서 사상 처음으로 1위(33.2%)를 차지했다. 대선과 총선 2차 투표에서 기성 좌, 우파 정당이 합작, 극우 후보를 견제하는 프랑스 특유의 '공화주의 전통'에 따라 2차 투표에선 NUPE(180석), 앙상블(159석)에 이어 142석에 그쳤지만, 이 역시 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2027 대선에서 르펜의 당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게 점쳐지던 상황에서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조르당 바르델라(29) RN 대표가 출마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인물 중심으로 치러지는 대선의 특성상 르펜의 지지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르펜은 판결 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반하는 판결이라고 통분했다. 그는 국영 TF1 방송 인터뷰에서 "재판장은 법치주의에 반해 즉시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나의 출마와 당선을 막기 위해 항소심을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이게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모르겠다"라면서 "나의 정치적 죽음을 추구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바르델라 대표의 대권 도전에 대해서는 "당의 엄청난 자산을 너무 빨리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라면서 항소 의사를 분명히 했다. 바르델라는 "프랑스 민주주의가 살해당했다"고 성토했다.
프랑스는 물론 각국에서 판결을 둘러싸고 민주주의 본령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극좌, 극우 포퓰리즘 진영은 '민의'를 앞세웠고, 기성 제도권 정치인들은 "법 앞에 예외가 없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앞세웠다. 일부 판사들의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 탓에 사법부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무관치 않은 논란이다.
'불굴의 프랑스(LFI)' 대표로 NUPE을 이끌고 있는 멜랑숑도 비판에 합류했다. 그는 "정치인을 자리에서 몰아내는 결정은 국민이 해야 한다"라며 판결 결과를 비난했다. LFI는 "우리는 법원을 이용해 RN을 제거한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RN과 투표함에서 또 거리에서 싸운다"는 입장을 밝혔다. 극우 포퓰리즘 정당 레콩퀘스트(재정복)의 에릭 시오티 전 대표 역시 "누구에게 투표할지를 결정하는 건 국민이지 판사들이 아니다. (르펜과) 우리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린 르펜의 출마는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시오티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적 운명이 말도 안 되는 사법부 도당들에게 몰수당했다"라고 성토했다. 제도권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마크롱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X 계정에 이날 4편의 글을 올렸지만,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과의 통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통화 내용 등을 전했을 뿐 판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회당 출신의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부적절한 판결"이라면서도 "전직 대통령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르펜은 다른 모든 피의자처럼 항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LR)'의 로랑 와우키에 하원 원내대표도 "심각하고 예외적 판결"이라고 논평했다.
소셜네트워크(SNS)에서는 이번 사건의 재판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사법부의 정치 개입을 비난하는 '판사들의 정부'라는 표현도 다시 등장했다. 1921년 법학자 에두아르 램버트가 처음 대중화한 이 표현은 사법부가 공공 정책, 특히 법과 규정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기본권 보장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치안판사 벵상 시재르는 "1789년(대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누구도 제도로부터의 예외라는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 선출직(국회의원)은 더욱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르몽드 기고문에서 "'판사들의 정부'라는 표현은 국민 주권보다 통치자들(정치인)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하며 판결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자크 블라르 파리 항소법원의 제1 법원장도 보도자료에서 "법치가 지배하는 민주 국가에서 사법 결정에 대한 비판이 어떤 경우에도 판사에 대한 위협으로 표현되선 안 된다"라면서 특히 소셜네트워크(SNS)에서 재판부를 구성한 판사 3명에 대한 인신공격이 벌어지고 있음을 개탄했다. 헌법기관인 고등사법평의회(CSM)도 "이러한 반응은 헌법이 보호하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각국의 우파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이번 판결을 일제히 비난했다. 특히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검찰을 동원해 정적을 통제했다고 주장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이들이 그녀(르펜)가 유죄 판결을 안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라면서 "매우 큰 문제"라고 말했다. 자신이 대선 기간 4차례 형사 기소됐던 것에 빗대 "매우 이 나라(미국) 같다"라고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인 일론 머스크도 "급진 좌파는 민주적 투표를 통해 승리할 수 없을 때 법 제도를 남용해 반대파를 투옥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그들의 표준 교본(playbook)"이라고 비꼬았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X 계정에 불어로 "내가 마린이다!(Je suis Marine!)"라고 적으며 르펜 지지를 표명했다. 오르반 총리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 피데스 출신. 역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이지만 집권 뒤 중도의 길을 걷고 있는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민주주의에 슬픈 날"이라면서도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혐의의 근거나 가혹한 결정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정당 지도자를 표적으로 삼아 수백만 시민의 대표권을 박탈하는 판결에 기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점점 더 많은 유럽 국가들의 수도가 민주적 규범을 짓밟는 길로 가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내정에 간섭하고 싶지 않으며 그렇게 한 적도 없다"라며 선을 그었다. 르펜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공개 표명하며 2017년 대선 직전 모스크바를 방문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서방의 러시아 중앙은행 동결자산 사용에 반대하는 등 친러시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판결의 최대 승자는 집권당인 앙상블이다.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치솟는 물가 탓에 마크롱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달리 르펜에 맞설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소심 심리와 판결은 최장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2027년 4월 대선까지 또는 그 후에도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각국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갈수록 세를 넓히는 것은 기성 제도권 정치가 국민적 열망을 반영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엔 기성 제도의 중추를 이루는 사법부의 신뢰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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