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는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예정된 러시아의 2차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각국 정상들이 참가한다.
성사된다면 2012년 4월 11일 당 제1비서로 등극한 뒤 사상 처음으로 다자 간 이벤트에 참석하게 되는 셈. 도널드 트럼프 시대 한반도 안팎의 정세 변화에 획을 긋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4일 언론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의 전승절 행렬 참석을 거론하는 것은 성급하다면서도 방문을 기정사실로 했다. "김정은은 유효한 초대장을 갖고 있다"라면서 "방문 일자는 외교적 채널을 통해 확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 6월 평양 북러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을 초대해 놓은 상태.
북·러는 고위급 접촉을 통해 지도자들의 친서를 교환해 왔다. 지난 21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방북, 김 위원장을 면담하고 푸틴 대통령의 친근한 인사와 '중요친서'를 전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15일에는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차관이 평양에서 최선희 북한 외무상과 만나 고위급 및 최고위급 정치 접촉을 논의했다. 앞서 리히용 북한 당 중앙위 비서는 지난달 27일 크렘린궁으로 푸틴을 예방하고 김 위원장이 보내는 '전투적 인사'를 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러시아는 전승 80주년 열병식에 각국 정상은 물론 각국 군대도 초대할 것으로 전해졌다. 쿠르스크 전선에 투입돼 러시아군과 함께 싸운 북한군의 퍼레이드 참가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나리오다. 북·러는 작년 11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의 비준 절차를 마쳤고 이후 북한군의 러시아 이동이 포착됐다.
러시아 전승절 퍼레이드가 열리는 5월 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적극적 중재로 우크라전이 일단락되고 미·러와 북·미 관계가 재설정될 시점이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우리는 나치즘을 격파한 세대의 자식이고, 손자이며, 증손자"라면서 2025년을 '조국 방어의 해'로 선포하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러시아에 2차대전 승전의 기억은 과거지향적인 회고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에 파시즘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2022년 2월 24일 특별군사작전에 돌입하면서 한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의 중립화, 비무장화와 함께 탈나치화를 명분으로 제시했다.
전승 80주년은 중국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다. 중국은 2차대전을 아예 '반파시스트 세계전쟁'이라고 칭한다. 왕이 중국 당 중앙외사판공실주임 겸 외교부장은 지난 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자회견에서 "반파시스트 세계전쟁 승전 80주년을 맞아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아시아(일제)와 유럽(나치)에서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 싸운 것을 함께 기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러시아 밀착(Pivot to Russia)' 행보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 닉슨'을 예측하지만, 러·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푸틴과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세 차례 대면 정상회담을 가졌고 올해 러·중의 전승 기념일역시 정상회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침략에 저항한 중국 인민의 전승절'은 9월 3일이다.
유럽은 트럼프의 우크라전 종전 협상을 계기로 '미국 없는 유럽' 방위를 위한 초보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미국의 주도해 온 역할의 변화 또는 축소가 점쳐진다. 러시아는 우크라 평화유지군으로 나토군의 주둔을 원천적으로 거부하지만, 유엔 평화유지군은 반대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유라시아 동쪽의 안보기상도는 아직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유럽과 아프리카 주둔군 사령부의 규모 축소에 착수했지만, 인도·태평양 사령부는 제외했다. 올해 한미 연합연습 '자유의 방패(Freedom Shield)'도 지난 10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러 태세 전환에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폭 강도를 높인 동아시아 지역 연합훈련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미일, 미일호주, 미일필리핀 등 이른바 '격자형 동맹'의 대규모 연합훈련이 계속될지도 미지수다. 러시아는 트럼프 행정부 취임 뒤에도 나토가 한국을 비롯한 지역 국가들과 연합훈련에 참가하는 등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역할을 확대하는 것과 미국 주도 대규모 연합훈련이 지역 안보의 최대 위협이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지난 1월 한미일 해군의 연합훈련을 두고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비핵화가 미국의 목표임을 확인하면서도 '핵보유국' 북한과 접촉할 것임을 연거푸 시사하고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의 친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한국 내에서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면 한국이 소외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미·중 관세전쟁도 무한 충돌은 아니다. 트럼프는 중국을 상대로 관세전쟁을 시작하는 한편 미·중 정상회담의 개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1기 행정부에서 드러났던 패턴이다. 중국에 대한 일방적인 관세 부과→중국의 보복조치→미국 추가 관세 부과→중국의 반격 등의 악순환이 진행된 뒤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0일 미중 양국이 트럼프와 시진핑의 생일이 있는 6월 중 '생일 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중 정상의 생일은 트럼프 (1946년) 6월 14일, 시진핑 (1953년) 6월 15일이다. 김 위원장의 방러와 마찬가지로 구체 일정을 논의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조만간 가시화될 움직임이다.
김정은의 방러가 성사된다면 북한은 국제사회 고립을 벗어나는 의미를 갖게 된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과 양자 정상회담을 했지만 다자 정상회의에는 처음 참석하게 된다. 북한 체제 특성상 '최고 존엄'이 여러 나라 정상 중의 한 명이 되는 장면이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비동맹 외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을 돌아보면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다. 북한의 고립 탈피와 맞물려 생각해야 할 것은 변화의 시대 한국의 고립이다.
러시아 전승 80주년 행사는 세계적인 이벤트다.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 정상들의 참석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러시아에 '비우호적 국가'는 193개 유엔 회원국 중 49개에 불과하다. 브릭스(BRICs) 국가와 글로벌 사우스 국가 정상이 대거 참석할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의 참석 여부도 주목된다.
한·러 관계는 우크라전 발발과 윤석열 정부의 등장 이후 최악이다. 푸틴-김정은 정상회담이 두 차례 진행되는 동안 외교부 차관급 대화조차 작년 2월 이후 중단된 상태.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한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면서 러시아의 '비우호국' 명단에 올랐다. 세 차례 독자제재로 사실상 모든 교역품을 수출통제항목으로 묶어 놓았다.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에 올인한 대통령은 2023년 7월 키이우를 방문, '사즉생 생즉사'의 결의로 우크라의 승전을 기원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트럼프 2.0의 출범 이후 2차대전 이후 80년 동안 이어지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미·러가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3년 동안 무시했던 러시아가 그 변화의 한 축이다. 북미 관계 개선과 남한의 패싱(passing)은 어찌보면 작은 고민이다. 대한민국이 대러 관계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북한이 고립에서 벗어나는 순간, 더 큰 고립에 돌입하는 형국이 된다. '윤석열 이후' 새 정부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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