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65)이 지난달 16일 수원지법 항소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불법사찰부터 시작해 17년을 끌어온 사건이다. 의외로 그의 소감은 덤덤했다. 홀가분함과 설렘이 섞여 있다. 판결 다음 날 서울 마포구 신수동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이후 여러 번 온‧오프라인에서 나눈 이야기를 세차례 나누어 소개한다. 국보법 제7조 제1항(찬양·고무)의 문제와 함께 20여 년간 그가 교류협력에서 체득한 교훈, 이를 토대로 남북관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날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긴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남북교류는 크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 주저앉는 순간 길이 끊어진다. 행로를 달리할지언정 다시 걸어야 할 길이다. 교류가 끊어진 지금이야말로 지난 과정의 오류를 톺아보고, 나아가 길을 모색할 적기다."
민간단체의 대북 교류협력은 쑥대밭이 된 지 오래다.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뒤 사실상 단절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고 '민족'과 '통일'을 지우기 시작한 뒤에는 재개될 희망조차 가물가물하다.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20여 년간 대북 교류에 나섰던 많은 민간단체가 주저앉았다. 그런데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근거는 뭘까. 여전히 가능한 행로인가. 그가 밟아 온 길에 그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시련의 서막
2006년,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9월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쿤밍 축구학교에서 훈련한 선수들이다. 초등학교 축구 꿈나무들로 12세 남북 단일팀을 꾸렸다. 10월 15일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 유소년 축구대회. 경평 축구, 서울과 평양이 울력으로 일제 강압 통치에 맞섰던 장엄한 역사를 되살리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정치적 환경도 좋았다. 대북 화해협력을 추진하던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의 예산 지원은 물론, 기업 후원도 쏟아졌다. 당시엔 '선 지출, 후 지급' 방식이었다. 갖고 있던 부동산도 많던 시절. 서울 신촌 오거리에 20층 빌딩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준비에 나섰다. 중국 윈난성 쿤밍의 남양브라질 국제축구학교에서 합숙 훈련을 했다. 대회 6일 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북한의 첫 핵실험으로 세상이 뒤집힌 것. 통일부는 사업자금을 회수했고, 기업은 후원을 취소했다. 취재에 나서려던 방송사들도 일정을 접었다. 통일부가 사업 자체 승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대출금으로 밀어붙였다. 쿤밍에서 방콕으로 직행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당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태국 정부가 북한 선수들에 대한 비자를 취소했다. 출발 하루 전 항공권을 취소하느라 상당한 위약금까지 물었다. 허위허위 남측 선수만 대회에 참가했지만, 성적이 좋을 리 있었겠나. 참가팀 중 꼴찌를 했다. 부도 행렬이 시작됐다. 담보 부동산은 경매에 넘겨졌고, 여행사를 비롯해 당시 운영하던 기업체는 줄도산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까지 쓰러지셨다.
사시던 집에 압류 딱지가 붙는 걸 보고 충격받으신 것. 내 명의로 된 집이었다. 인간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시간이었다. 전 재산이 날아가자, 가족의 질타가 쏟아졌다. 처는 친정으로 가버렸다. 첫 시련이었다. 막막한 마음에 난생처음 한강 다리를 찾아 서성거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수습이라도 하고 보자." 사업을 한 뒤 처음 겪는 시련. 엉뚱한 곳에서 부축의 손길이 다가왔다. 10월 말, 북측은 우리 가족을 평양에 초청한 것. "우리 때문에 망했다"라는 자책이었을까. 특별한 여행이었다. 어머니와 누님, 집사람과 막내아들, 조카와 함께 평양 문수 초대소에서 4박 5일을 묶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동명왕릉을 구경하고,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배려해 대동강 유람선을 한 척 내어 우리 가족만 태우고 한나절 유람을 하도록 했다. 묘향산도 다녀왔다. 어머니는 2009년 돌아가실 때까지 평양 여행의 추억을 잊지 못하셨다. 정치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신뢰는 이어졌다. "그래, 다시 해보자!"
특별한 가족여행
다음 달, 쿤밍 축구학교 출신 남측 학생 선수들과 평양을 찾았다. 그해 11월, 평양 시내는 썰렁한 분위기였다. 국제사회 제재와 중국의 대북 송유관 차단에 고립이 심화된 탓에 정적에 쌓여 있었다. 다녀와 통일부를 찾아 하소연했다. 북한 핵실험이 일차적 이유이지만, 정부가 행사 취소를 하면서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민간단체가 정부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나. 정부가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나?" 통일부 직원들도 "2000년 남북 교류협력이 시작된 뒤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내년 한·미 연합훈련 기간에 북한 축구팀을 데려와 전지훈련을 성사시켜 보라"는 것. 대화 계기를 찾으려던 노무현 정부의 의지가 담겼던 것 같다. 12월, 다시 방북했다.
국방위원회 산하 체육위원회 이종무 위원장은 즉각 제안을 받았다. 체육위 위원장은 상(장관)급. 지금은 국무위원회 소속이다. 북측 역시 핵실험 뒤 화해 제스처가 필요했을 터. 2007년 3월 4.25 청소년축구단(17세 이하, U-17)을 데리고 쿤밍에서 비행기 편으로 도착한 인천공항은 북새통이었다. 국내 언론은 물론, CNN과 NHK, 중국 CCTV 등 외신까지 몰려들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뒤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풀리는 신호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부도 환영했다. 그걸 계기로 대화 분위기로 바뀌면서 그해 10·4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스포츠가 평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보기관의 B가 처음 찾아온 건 그즈음. 그때만 해도 주로 북한 측의 동향을 탐문했다. 4.25 청소년축구단은 한 달 동안 전국 순회 전지훈련을 했다. 사상 처음이라 제주, 순천, 광양, 수원, 서울 등 가는 곳마다 언론이 관심을 보였다. 국내 팀과 몇 차례 연습경기도 가졌다. 2007년엔 남북 축구 꿈나무들이 네 번 분계선을 오갔다. 6월 남북 유소년축구 정기교류전이 전남 강진 종합운동장에서, 11월엔 평양 김일성 종합경기장에서 각각 열렸다. 8월 북한의 17세 이하 팀은 1주 간 전남 광양에서 전지훈련을 한 뒤 대한민국에서 열린 17세 이하 FIFA 월드컵 출전에 출전,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6강에 진출했다. 4.25 유소년 축구단은 10월 넉 달 만에 다시 전남 강진을 찾아 그곳에서 열린 국제 유소년축구대회에 참가했다.
2008년 5월 평양 4.25 경기장에서 보름 동안 합동훈련을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첫 방북 축구였다. 쿤밍에서 석 달간 훈련한 북한의 어린 선수들은 2008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다시 우승했다. 값비싼 대가를 치렀을지언정 첫 시련이 지나가는 줄 알았다.
평화가 된 축구
"공은 둥글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늘 강조했지만, 축구 교류는 많은 경우 한껏 고조된 군사적 긴장과 맞물려 진행됐다. 2008년 7월 관광객 피살사건 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다시 찾아온 정보기관의 B는 태도가 달라졌다. 북한 체제에 불만이 있는 사람을 파악해달라고 주문하기 시작했다. 2009년 북한의 ICBM 시험발사와 두 번째 핵실험이 다시 남북관계를 엄동설한으로 돌려놓았다. 이명박 정부는 대북 정책을 강경 기조로 전환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은 전환점이었다. 평양에서 예정된 유소년축구 정기교류를 돌연 불허했다. 그해 10월 대회 개막 하루 전이었다. 4년 만에 악몽이 재연됐다. 80여 명의 항공권을 취소하고, 급히 장소를 중국 쿤밍으로 옮겨 개최했다. 같은 해 5.24 조치는 결정타였다. '대동강 1호 공장' 사업 승인이 취소됐다. 언젠가 대동강 1호 공장으로 되돌아갈 생각에 2011년 11월 중국 단둥으로 옮겨 공장을 착공했다. 한 달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그 와중에도 축구공은 계속 굴렀다. 유소년축구 국제대회는 장소가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진행됐다. 전쟁 위기 속에서도 치렀다. 2014년 10월 10일,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부양이 화근이었다. 경기 연천에서 북쪽으로 날린 삐라 풍선에 북한군이 고사기관총을 발사한 것. 우리 군의 대응 사격으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연천은 제1회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 축구대회(15세 이하)가 예정된 장소. 북측 선수단 참가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김 이사장은 중국 베이징으로 나가 4.25 유소년선수단을 직접 국내로 인솔했다. 긴장 속에서도 무사히 대회를 치렀다. 산 넘어, 산이었다. 제2회 아리스포츠컵 평양 대회를 앞둔 2015년 8월에는 군사적 긴장이 더 커졌다.
4일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북한군의 목함지뢰를 밟은 우리 군 병사 2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는 돌발사태에도 방북을 승인, 남측 선수단과 함께 16일 평양 양각도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우리 군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시작하자, 북측은 철거하지 않으면 포격하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남북 포격전이 벌어졌고, 북한은 18일 '준전시상황'을 발동했다. 대회 개막 전날이었다. 정부가 먼저 "선수단 철수"를 종용했고, 북측도 "내일 아침 개막식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대회 조직위원장이던 그는 강행을 고집했다. 19일 새벽 북측 관계자가 호텔 방문을 두들기더니 대회 정상 개막 결정을 전했다.
밖에선 "남조선 타도" 안에선 "동포 이겨라"
버스 편으로 경기장까지 가는 길에 차창 밖을 보니 "미국, 남조선 타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막상 5.1경기장에 들어서니 10만 관중이 운집해 있었다. 남측 어린 선수들이 제3국 팀과 경기를 하면 어김없이 남측 팀을 응원했다. 경기장 밖에서는 남조선 타도를 외치고, 안에서는 "동포 이겨라!"는 함성이 들린 것. 그날 오후 북측 보위부 관계자가 찾아와 "남북 고위급 접촉을 열기로 했다. 전쟁은 안 날 거다"라고 말했다. 남북 모두 파국을 원치 않았던 것. 남북 아이들의 축구 경기는 다시 평화의 상징이 됐다. 이어진 고위급 접촉에선 이산가족 상봉이 합의됐다.
평양 대회를 끝내고 함께 중국을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입국장이 난리였다. 언론 매체마다 마이크를 들이댔고, YTN은 1시간 동안 생방송을 했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면 통일부가 통제에 나선다. "평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언론이나 외부 강연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통일부에 사전 각서를 제출했었다. 다가오는 언론을 외면하기 어려워 전쟁 위기 속에서 치른 대회 의미를 말했더니, "함구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라는 통일부의 질책이 전달됐다.
순수는 아름다울지언정 현실이 되기 어렵다. 남과 북이 만나는 지점엔 숱한 지뢰가 매설돼 있다. 뜨거운 가슴만으로 갈 수 없는 길이 평양으로 가는 길이다. 냉철한 머리만으로도 안 된다. 그 중간 어딘가에 좌표가 있을 것. 이 마당에 다시 교류 이을 방안은 무엇일까? 길이 끊어진 지점으로 돌아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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