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유럽에서 미군을 일부 철수시킬 생각이 있지만,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할 생각은 없다. 우크라이나 종전을 서두르며 푸틴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 같지만, 트럼프는 러시아의 승리도, 우크라의 승리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승리를 추구할 뿐이다. 승리의 내용은 우아하게 표현해 국익이고, 쉽게 말하면 현찰이다. 우크라나 유럽 동맹국들의 협상 참여는 부차적인 문제. 어차피 타협은 미·러 간에 이뤄진다.
협상 앞서 드러낸 '속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속도를 내는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의 골자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18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첫 대면 협상을 시작한다. 지난 12일 "즉각 종전 협상"을 합의한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통화 뒤 18일 미·러 외교 회담이 열리기까지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내놓은 미국의 입장은 위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 측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루비오 국무장관 등이 입장을 내보였다. 외교안보 현안을 다루는 트럼프 행정부의 패턴을 읽을 기회다.
이를 한반도 문제에 적용하면 어떤 윤곽이 드러날까. 일단 우크라 종전 협상 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속내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2일 하루는 우크라 종전 협상 논의가 급진전 된 날이었다. 트럼프는 푸틴과 통화 뒤 자신의 X 계정 트루스 소셜에 글을 올려 "우크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즉각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밤 러시아가 억류 중이던 미국인 마크 포겔을 석방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이 대목은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두고 2018년 5월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의 귀환 장면의 데자뷔다. 미국에선 대통령의 업적이 된다.
"안보주인의식을 가져라"
푸틴은 트럼프를 모스크바에 초청했고, 트럼프는 서로 상대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우크라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입장은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과 헤그세스 장관이 내비쳤다. 중요한 건 미국이 노리는 이권 목록이다. 베센트 장관은 미국의 초기 군사 지원 대가로 우크라 희토류 광물의 50%를 제공하라고 요구했고 헤그세스는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열린 우크라방위연락그룹(UDCG) 회의에서 유럽 회원국들의 '안보 주인의식(security ownership)'을 강조하며, 트럼프가 강조한 대로 각국의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 5%로 인상하고, 방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토가 합의한 국방예산 목표는 GDP 2%(웨일스 가이드라인)이지만, 어차피 트럼프의 거래 방식은 기존 합의를 무시한다. 나토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32개국 국방예산은 GDP 대비 2.71%였지만, 전체 나토 국방예산의 3분의 2를 점하는 미국(2.9%)을 제외하면 1.8%에 그친다.
헤그세스는 또 종전협상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으로 △우크라의 잃은 영토 복원은 비현실적 목표 △우크라의 나토 가입 반대 △미 평화유지군 파병 반대 등을 공개했다. 다음 날 헤그세스는 나토 국방장관 회의 연설에 우크라 영토 부분을 제외했지만, 우크라의 영토 양보는 트럼프가 대선 유세 때부터 공공연히 밝혀 온 입장이다. 미국의 요구는 우크라 희토류 50%와 헤그세스가 강조한 '안보 주인의식'에 방점이 놓여 있다.
나토 국방예산 올리면 미 방산업체 호재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몇 주 동안 미국 관리들은 미사일 시스템과 탄약 및 포탄, 인공지능(AI), 사이버 전쟁과 관련해 각국 군대 간 긴밀한 '상호운용성'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상호운용성은 결국 미국 무기의 기준에 맞추라는 것으로 유럽 국가들이 미국 방산업체와 더 많은 계약을 하라는 주문이다.
트럼프는 "수백만 명(실제론 수십만 명)이 죽은 전쟁을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한다"고 되풀이 강조한다. 하지만 종전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목표를 감추지 않고 있다.
우크라와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의 폭탄선언에 경악했지만, 17일 파리에서 연 긴급 정상회의에서 공동의 뚜렷한 대응 방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더네이션은 트럼프와 헤그세스 연설로 드러난 미국의 접근 방식은 '깡패(gangster)외교'라고 비꼬았다. 전쟁의 직간접 당사국인 우크라와 유럽국가들은 종속 변수로 돌렸다.
모두에 미군 감축 문제를 거론한 건 트럼프에게 미군의 존재는 협상의 요긴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는 독일의 국방예산 증액을 둘러싼 이견 끝에 주독 미군을 3만 4500명 중 9500명을 감축하는 안을 승인했다. 전체 유럽 주둔 미군 병력 1만 2000명의 재배치 또는 본국 귀환을 목표로 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취임 뒤 백지화한 계획이다. 한반도 문제에서 트럼프가 보여 온 입장은 큰 틀에서 비슷하다.
김정은에 추파 던지는 트럼프, 왜?
우크라 종전 협상에서 유럽의 입장을 사실상 외면한 채 미-러 회담을 여는 것처럼 한국 빠진 북·미 회담을 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선순위에 놓지 않았을 뿐이다. 트럼프는 가자지구→우크라전 순으로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취임 당일(1.20)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핵보유국(nuclear power)라고 칭하고, "내가 돌아온 것을 그가 반기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는 '김정은에게 다시 손을 내밀 것인가'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의 희토류처럼 트럼프가 북한으로부터 직접 얻어낼 국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북한 역시 희토류를 비롯해 광물자원을 갖고 있지만, 전력난 및 교통 인프라 부족 탓에 미국이 선뜻 탐내기 어려울 걸로 보인다. 아직은 어음 상태. "전임자들이 하지 못한 일은 내가 했다"는 외교적 업적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으로 관측된다. 2018년 북미 대화 분위기 와중에 밝힌 것처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해안에 멋진 호텔을 지을 수 있다. 한국에서 받아낼 현찰은 수두룩하다.
트럼프는 "미국이 사실상 유럽을 지켜주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부자나라인 한국 방위비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하고 있다'는 억지 논리를 반복해 왔다. 나토에 대해 GDP 5%의 국방예산을 요구한다면, 한국에 대해서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인상을 줄곧 강조했다. 이번엔 '호가'가 더 높아졌다. 2019년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정 당시 8억 3000만 달러였던 분담금을 최대 50억 달러 이상으로 인상하라고 요구하다가 1기 임기 중 매듭을 짓지 못한 채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왔다. 이번엔 10배(100억 달러)를 내밀고 있다. 100억 달러는 세계 최대 호화 미군기지로 꼽히는 평택 캠프 험프리스 건설비용과 같다. 트럼프의 셈법은 이미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제외한다. 이 중 92%를 한국이 부담한 건 외면한다. 트럼프는 지난해 타임지 인터뷰(4.30.)에서 "부자나라를 다른 나라가 공짜로 지켜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트럼프의 예상 청구서
한국의 국방예산 인상 요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지난해 59조 4240억 원(45.5억 달러)으로 GDP 대비 2.34%로 이미 유럽 평균을 웃돈다. 그러나 안보 주인의식 또는 자주국방의 의지는 강하지 않다.
우크라전 관련 유럽 안보의 위협인 러시아와 직접대화에 적극적이듯 우리 안보의 위협인 북한을 들먹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크라 없는 미·러 회담'을 하듯, '한국 없는 북미 회담'을 한다면, 그 자체가 압력이 된다. 1기 트럼프 행정부는 SMA 협상에선 미국 전략 폭격기나 항공모함의 한반도 안팎 배치 비용을 주장했었다. 한미 워싱턴 선언(2023.4.26.)에 따른 미 전략핵잠함(SSBN)과 전략폭격기의 정기적인 '방문'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다. 물론 조약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맺은 합의이기 때문에 트럼프가 워싱턴 선언을 승계할지는 미지수다. 승계에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주한미군 감축 역시 1기 행정부에서 검토했던 사안.
당시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트럼프는 지난 12일 '대외관계에 있어서 미국의 한 목소리(One Voice)'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을 발표,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외교권을 새삼 강조했다.
'우크라의 희토류'는 한국에도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천문학적인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받았지만, 더 많은 반도체, 자동차 공장을 미국에 지으라고 압력을 넣을 수도 있고, 이미 관심을 표명한 조선산업을 통한 기여를 요구할 수도 있다. 한국산 철강, 알루미늄제품에 부과한 관세에 더해 트럼프가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항목은 즐비하다. 이미 지난 15일 뮌헨에서 열린 첫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미국의 청구서 또는 한국의 자진 납부 제안의 일단이 공개됐다. 미 국무부는 회담 뒤 발표문에서 "루비오 장관은 조선과 반도체,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확대를 통한 에너지 분야 협력을 강화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환영했다"고 밝혔다.
주한미군 감축?
한국과 우크라, 한국과 유럽 국가들은 물론 다르다. 공무원과 군인 봉급까지 외국의 지원으로 충당하는 우크라와 달리 한국은 상당한 지급 능력이 있다. 충분한 안보적, 외교적, 경제적 대가가 있다면 흥정에 나설 용의도 있다. 미국 외교는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 비슷한 패턴을 한국에 적용할 가능성이 다분한 이유다. 또 러시아와 손을 잡는 모양새로 유럽을 압박하듯, 북한과 대화하는 모양새로 한국을 압박할 수도 있다. 우크라 종전 협상은 안보를 돈으로 환산하는 트럼프의 셈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가설 단계에서 이를 한반도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트럼프는 주한미군을 일부 빼낼 생각이 있지만,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생각은 없다. 북·미 대화 분위기를 띄우며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북한의 손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미국의 승리를 추구할 뿐이다. 승리의 내용은 역시 국익 또는 돈이다. 한국의 협상 참여는 부차적인 문제. 어차피 타협(deal)은 북·미 간에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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