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74년이던 지난 25일, 국무회의 결정 중 세간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한 내용이 있다. 장미란 문체부 2차관이 결과 브리핑에서 설명한 남북 이산가족 생사 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 내용이었다. 기존에 5년 단위로 실시하던 이산가족 실태 조사 주기를 3년 단위로 줄이겠다는 것.
'최근' 이산가족 사망이 늘었다는 정부
이유인즉 "최근 생존자들의 사망이 증가하고, 생존자 평균 연령이 고령화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쉽게 말해 생존자들의 수를 앞으로 5년 단위가 아닌, 3년 단위로 세겠다는 말이다. 생뚱맞다. 이산가족 생존자들의 고령화로 사망자가 늘어난 건 '최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진행돼 온 '오래된 현재'이다.
미국에선 의회가 나섰다. 이날 미 연방하원 본회의에서 '이산가족 국가등록 법안'이 가결됐다. 한국계 미셸 박 스틸 의원(공화, 캘리포니아)과 제니퍼 웩스턴 의원(민주, 버지니아)의 공동발의 법안으로 찬성 375 대 반대 8의 압도적인 가결이었다. 국무부가 재북 가족과 재회를 희망하는 한국계 미국인 가족들을 파악, 명단을 작성한다는 것. 국무부가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면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국무부에 100만 달러(13억 원)의 예산을 배정, 매년 상봉 현황을 보고토록 했다. 역시 별 의미가 없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미 화석화된 이산가족 문제를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지난 4월 말 기준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13만여 명 가운데 생존자는 3만 8000여 명, 생존자 평균 연령은 83세이다. 전쟁 발발 연도 기준 아홉 살배기가 부모를 만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한 세대를 20~30년으로 친다면 부모의 연령이 103~113세이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부모 자식이 만나는 '수직 상봉'이 희귀한 사례가 됐다. 어쩌다 수직 상봉이 이뤄져도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들어가는 육신이 정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그렸을 자식을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기막힌 장면. 부모는 휠체어에 앉아 자식의 젖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미 의회의 이산가족 법안
신문에 눈물이 적은, '마른 상봉'이라는 표현이 나온 지도 까마득하다. 부모 상봉은 2박 3일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형제, 친척 상봉은 첫 만남에서 잠시 눈물을 보이다가 곧 갖고 온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잃던 순간부터 수십 년 애간장 태웠을 사연이 끝없이 흘러내리는 '젖은 상봉'의 골든타임은 애저녁에 끝났다. 그 오랜 세월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 이슈로 소비해 온 남북 위정자들 탓에 역사가 돼버린 것. 이승만-김일성부터 위정자들조차 대부분 사라졌다. 윤석열-김정은은 아예 이산가족 문제를 입에 담지도 않는다. 올해 40세가 된 북측 위원장이야 아직 연륜 부족 탓에 이산의 슬픔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쳐도 초로의 남측 대통령까지 침묵하는 건 이념적,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적 연구 주제다.
대통령은 25일, 모처럼 여러 일정을 소화했다. 대구 엑스포에서 '6.25전쟁 제74주년 행사'에 참석하고, 대구·경북 지역 참전 유공자들을 초청해 위로연을 했으며, 부산 해군 작전기지에 정박 중인 미 해군 시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을 방문했다. 세 곳에서 주로 한미 양국의 전사자를 기리고, 참전 유공자들에게 감사하며, 유가족에 위로를 건넸다. 미 항모의 입항은 26~27일 한미일 3국의 사상 첫 다영역 군사훈련 '자유의 모서리(Freedom Edge)' 참가를 위한 것. 대통령은 한미일 협력이 한미동맹과 함께 강력한 억제 수단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군 14만 명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4만 명의 전사자를 기리면서 '국민'은 사망‧학살‧납치‧실종자 수(100만 명)와 관련해서 간신히 등장했다. 그 많은 말의 어느 문맥에도 '빠르게 소멸하는 국민'은 없었다. 대신 "북한의 도발에 압도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다짐이 이어졌다. 요약하면, 지난 전쟁을 기리고, 다음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말이다.
납치자 문제 해결 노력해 온 일본
'마른 상봉'의 자리라도 마련하려면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할 터. 아예 말을 섞을 생각조차 없다는 속내의 다른 표현이다. 항모 방문은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를 향한 갈망을 드러낸 것. 현 상황에서 아무런 해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산가족 문제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대 정부가 대물림해 온 과보(果報)다. 전쟁 기념일에라도 짚고 넘어가는 게 도리라고 본다.
대통령이 우리 안보에 필요한 국가로 평가하는 일본은 '한 줌도 안 되는 국민'의 아픔에 국가가 나서고 있다. 최근 몽골에서 북한과 접촉해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보였다. 요코다 메구미 딸의 일본 방문 전망이 나온다. 지지율이 바닥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정치적 목적이 투영됐을지언정 의미 있는 전개다. 한국전쟁 이산가족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는 인도적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자세가 가상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국가방위전략에 북한을 중국에 이은 '제2의 국가 위협'이라고 버젓이 명시하고도 교섭에 나선 그들이다.
전쟁기념일에나 돌아보는 '야만의 현실'
태평양전쟁 기간 북한 지역에서 숨진 일인은 3만 4600여 명이고, 북에 남겨진 유골이 2만 1600여 주라고 한다. 동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북한도 역시 정치적 셈법에서 일인들에게 '곁'을 내준다. 아베 신조 내각은 2012년 북일 적십자 회담을 통해 청진, 함흥, 평양 등지로 성묘를 이뤄냈다. 정치적 타산이 깔려 있더라도 이런 '정치'는 얼마든지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마른 상봉조차 없어진 지 오래다.
지난 4월 이산가족 현황은 이미 낡은 숫자다. '사망자 증가'라는 행정적 표현의 현실적 지표는 실향민 전용 묘지(파주 통일동산)로 하루에도 수없이 밀려오는 장의차량 행렬이다. 허수이기도 하다. 아예 포기하고, 상봉 신청을 하지 않은 가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스틸 의원은 보도자료에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의 수를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한 사람만 '이산가족'으로 기록하는 행정편의 사고에 갇혀 생존자 숫자나 더 자주 세겠다는 발상. 역사에 길이 남을 무능과 무책임, 공감 부족의 표본이다. 사적인 한(恨)일지언정 공적 과정을 통해 풀어내는 게 '인간의 얼굴을 한 정부'의 본질이다.
영국 노동당의 권토중래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로 돌려놓겠다" (1) | 2024.07.06 |
---|---|
'톨레랑스의 프랑스'가 어쩌다가... 극우 국민연합(RN) 총선 1차 투표 압승 (1) | 2024.07.02 |
푸틴 방북 코앞 한반도 '태풍 전 고요', 신원식 러 비방 '역풍' (0) | 2024.06.13 |
'러시아 앞마당' 돌며 북한 비난하는 분단국 대통령 (2) | 2024.06.12 |
대통령 국내 머문 6개월 간 일정 빈날이 무려 69일 (2) | 2024.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