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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교시 철거 보는 북한 주민의 심정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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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새로 건설된 평양에는 역사적, 이념적 모뉴먼트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만수대 의사당 언덕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비롯해 대부분 북한 주민을 주 대상으로 하는 상징정치의 형상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모뉴먼트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이다.

낙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2001년 8월 14일 준공된 탑이다. 항공기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의미의 절반만 보았다. 새롭게 발견한 것은 5년 전 처음 개성~평양 고속도로로 평양을 찾았을 때였다. 고속도로에서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서 있기에 일종의 관문임을 깨달았다. 그 밑을 지나야 평양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복차림의 남과 북의 여성이 두 손으로 '3대 헌장'을 떠받드는 형상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궁극적인 통일을 지향한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장소를 기념한 쑥섬 혁명사적지도 낙랑구역에 있지만, 통일보다 김 주석이 그 자리에서 연설한 것을 기념한다. 김구, 김규식 선생이 참석한 회의다.

14일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 시야가 뿌옇다. 2024.1.14. 연합뉴스

사라질 상징, 없어질 동족

'3대 헌장'은 △ 7·4 남북 공동성명의 자주·평화·민족 대단결 원칙(1974) △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1993.4.7) △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1980.10.10)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6년 3대 헌장을 김 주석의 '통일 유훈'으로 제시했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김일성-김정일주의이다. 수령은 북한 주민에게 절대적인 존재다. 숭고한 의미마저 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이 파천황의 의미를 갖는 것은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수복, 편입시키겠다"는 말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그 기념탑을 두고 "평양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해버리겠다"고 다짐한 게 북한 내부적으로 더 충격적인 사변이다.. 

그는 "통일, 화해, 동족 개념을 없앤다"면서 "이여의(나머지) 조치들도 실행하겠다"고 말했다. 단순히 평화통일을 무력통일로 전환하는 정치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두 가지 엉뚱한 소재가 떠올랐다. 우선 노래다.

'반갑습니다' '다시 만납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어린 공연단원들이 평양과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장, 서울에서 수없이 불렀던 노래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래는 힘이 세다. 정서적으로 속을 후벼파고, 숱한 눈물을 자아냈다. 이 역시 선전선동이었다면 대단히 감동적인, 그래서 효과적인 도구였다. 그들 역시 울었다. 북에서 금지곡이 되면 일부 주민들이 음성적으로 나직히 부를지도 모르는 '반체제 가요'가 될 운명이다. '통일 거리'라는 지명도 사라질 게 분명하다.

북한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군악대가 2013년 7월 27일 전승절(정전협정기념일)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국제평화대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2013.7.27. AP 연합뉴스

평양 남쪽 관문의 꼴불견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북한 당국의 '철거'와 이를 바라볼 북한 주민들의 표정이다. 철거를 어떤 방식으로 할지도 궁금해진다. '1호 사진'이라 칭하는 김일성 3대의 초상이 실린 신문 지면이나 펼침막도 신성시하는 사회다.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새삼 확인된 북한 주민의 유전자이다. 북 응원단원들이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박힌 야외 펼침막이 비를 맞고 있는 광경을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가 황급히 회수했다. 최고 존엄의 말 한마디, 한마디 역시 신성하다. 아무리 현직 최고 존엄이 힘이 세다고 해도, 돌에 새긴 선대의 말을 '철거'하는 건 주민 입장에서 세상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일 수 있다. 아마도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일 게다.

일각에서 김정은의 이번 조치가 체제 이반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 이유다. 그러나 북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남 사람'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후반의 탈북 지식인은 "아무리 김일성, 김정일이 신성시돼도 살아 있는 권력이 가장 중요하다"라면서 "평양 주민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철거 장면을 묵묵히 볼 것"이라고 말했다. "유훈 통치 역시 현재 권력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필요할 때 갖다 붙일 뿐"이라면서 "일반 주민들이야 먹고살기 바쁜 데, 죽은 지 수십 년 된 사람들을 누가 신경쓰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된 뒤에는 엘리트층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없다"고도 덧붙였다.

전문대 졸업 뒤 사회생활을 하다가 탈북한 50대도 이러한 생각에 대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세대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30대 이후 젊은 세대는 먹고살기 바빠서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나이 많은 분들은 '이게 뭐지?' '아버지, 할아버지가 세워놓은 걸 멋대로 허무는구나'라면서 좋지 않게 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20일 북측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첫날. 북측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북측 딸 안정순(70)이 남측 아버지인 안종호(100)할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소멸될 운명이다. 2018.8.20 연합뉴스

 "먹고살기 바쁜 데…"

북이 기념탑 철거를 하면서 주민들에게 교육교양할 내용은 짐작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3대 헌장은 선의를 갖고 제시한 것이지만, '정권붕괴'와 '흡수통일'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을 노려왔던 대한민국 것들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강조할 게 분명하다. 어차피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남측 대통령을 두고 '삶은 소대가리(문재인)' '파렴치한(윤석열)'이라며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수없이 내놓았던 북한이다. 김여정 당중앙위 부부장은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 제안에 정책 평가에 앞서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라면서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잘라 말했다. 남한 정부 역시 이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가짜 평화'라고 매도하며, 한미 연합군사연습에 열을 올린다. 해서, '통일'은 북의 금지곡 속에나 남게 됐다.

모두에 소개한 노랫말은 '다시 만납시다'의 1절이다. 탈북민들은 북에서 한때 유행했던 영화 <임꺽정>의 주제가가 금지 가요가 된 뒤 아무도 부르지 않는 점을 들어 통일노래 역시 소멸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머리'는 빨리 현실을 읽지만, '가슴'은 늘 반응 속도가 느리다. '반북 가요'의 2절은 이렇다.

"…부모형제 애타게/ 서로 찾고 부르며/ 통일아 오너라/ 불러 또한 몇해였던가/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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