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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헤커가 던진 김정은 전쟁결심설 "의도 분석은 동의, 전면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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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방아쇠는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였던 것 같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가 지난 11일 던진 '김정은 전쟁 결정설'이 한국과 미국에서 일거에 주목받게 한 열쇠말이었다. 한미 양국에서 동감 또는 반박론이 나왔다. 그런데 북한이 과연 올해 전쟁을 실행할까. 많은 전문가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칼린‧헤커도 '견고한 증거'가 없다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믿을 뿐이다.

북한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군악대가 2013년 7월 27일 전승절(정전협정기념일)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국제평화대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2013.7.27. AP 연합뉴스

'전쟁' 거론 자체가 눈길

두 사람은 지난 11일 '김정은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미국 북한 전문 '38노스' 기고문에서 "김정은이 1950년 6월 김일성처럼 전쟁으로 가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믿는다"면서 "한반도 상황이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작년 초부터 관영매체를 통해 전쟁 준비를 강조해 왔고, 특히 지난달 당중앙위 제9차 전체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교전 국가 관계'로 규정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북한의 변화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에 완연해졌다. 능동적 전환이기보다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목표가 좌절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노선이다. 김정은은 하노이행 열차에 오르기 두 달 전, 그해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길"이라고 했다. 칼린‧헤커가 지적했듯이 하노이에서의 좌절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줄 정도로 충격이었을 게다.

로버트 칼린. 시민언론 민들레

하노이 실패 5년이 된다. 그사이 세계가 바뀌었고, 북한과 남한, 미국도 바뀌었다. 가장 절실한 북한이 가장 크게 변한 건 자연스럽다. 싱가포르에서 환호작약했을 '새로운 대미 관계'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 중국과 러시아, 특히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구축한 것 역시 파격적이지 않다. 칼린‧헤커가 작년 초부터 북한 매체에서 읽었다는 전쟁 준비 조짐을 변화의 일단으로 볼 수는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굳이 반박한 내용이 아니다. 대부분 칼린‧헤커가 지난 11월 초 방한 강연과 대담에서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 경고'를 들고나왔다.

"전쟁 발생상황 설명이 없다"

두 사람이 언급한 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다. 우발적인 무력 충돌이나 제한전이 아닌, 전면전인 것이다. 그 덕에 주목도가 높아졌지만, 그 탓에 회의적인 반응도 일으킨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는 "엉뚱한 분석은 아니지만, 상호 오판에 따른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면 남북 모두 충돌로 얻을 실익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남북 간에 우발적인 충돌에 의한 분쟁은 몰라도 전면전은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칼린‧헤커의 주장에는 무엇보다 어떠한 맥락에서 전쟁이 촉발된다는 시계열상의 상황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그프리드 헤커. 시민언론 민들레

왕선택 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은 "김정은의 의도, 결심, 계획에 대한 칼린‧헤커의 분석에 동의하지만, 그 결과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전면전 수행 능력과 국제적인 지지 확보를 비롯한 국내외 제약 요인 탓에 실행도 쉽지 않다"면서 "결심하고 계획한다고 모두 이뤄지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서울의 한 미국 소식통은 "북한이 하노이 이후 정말 많이 변한 건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갑자기 비약해서 전쟁결정으로 연결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칼린과 헤커가 미국 내에서 사실상 고립된 극소수의 대북 대화파라는 점을 지적하며 결국 "대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칼린 두 달전엔 북의 '평양 파괴 경험' 강조

공교롭게 칼린‧헤커의 '38노스'기고문이 한미 양국에서 주목을 받은 뒤 나온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은 더 거칠었다. 남한을 '철두철미 제1의 적국이자 불멸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무력통일 의지를 거듭 내보였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전쟁 경고는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절에 가뒀다. 시정연설의 70% 이상에서 역설한 내용도 전쟁과 거리가 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5일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2024.1.16.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올해를 제8차 당대회(2021.1.)가 제시한 목표 달성의 결정적인 해로 규정하고 인민경제 전반적인 부문의 발전을 강조했다. '세기적 낙후성'에 머무는 농촌건설을 진척시켜 중앙-지방의 균형발전을 강조한 게 눈에 띈다. 스스로 제시한 살림집과 공공건물, 산업시설 건설 목표들을 달성하자마자 모래성이 되길 원하는 게 아니라면,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이 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칼린 본인이 불과 두 달 전 적극적으로 개진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1월 8일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대담에서 북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적극 부인하면 그 이유로 '파괴의 경험'을 들었다. "1950년대 평양이 어떻게 파괴됐는지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파괴를 다시 겪고 싶어 한다고는 정말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당시 파괴상을 주민들에게 매년 필름으로 보여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상충되는 지점이다.

북한의 전쟁준비 정황과 관련해 조선중앙통신의 지난달 28일 전체회의 결과 보도는 "인민군대, 군수공업 부문, 핵무기 부문, 민방위 부문이 전쟁 준비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할 전투적 과업이 제시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를 하는 것과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승산과 그 후과에 대한 2차, 3차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올해 시정연설 관철을 독려하는 선전화. 매년 20개 군씩 10년 동안 현대적인 공장을 짓자는 '지방발전 20X10 정책'을 홍보하고 있다. 2024.1.21.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21일 공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 관철을 독려하는 선전화. 2024.1.21.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의도·계획과 실행은 다른 문제

한반도 전면전쟁 시 북한의 최종 승리를 예측하는 시각은 나라를 막론하고 거의 없다. 칼린‧헤커도 '38 노스'에서 공허한 승리가 될지언정 한미가 이길 걸로 봤다.

칼린‧헤커는 김정은이 남한을 '적대적인 교전국'으로 규정한 점도 중요하게 봤다. 인민군대에 남한을 핵무기로 공격할 명분을 주었다고 해석했다. 이 대목은 토마스 섀퍼 전 주북 독일대사가 17일 자 '38 노스' 기고문에서 반박했다. 북한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남한을 상대로 핵공격 위협을 가했던 점을 들어 "북한의 오랜 행동 패턴"이라며 의미를 깎았다.

그러나 김정은이 목소리를 높인 남북관계의 전환은 섀퍼가 말한 '과거 패턴'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특히 "통일, 화해, 동족 개념을 없앤다"며 "평양 남쪽 관문에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해버리겠다"는 말은 이행 정도에 따라 북한 국내에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북한은 여전히 김일성-김정은주의가 지배한다. 대남정책을 전환하는 것과 할아버지가 제시하고, 아버지가 이어받은 '3대 헌장' 자체를 파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기념탑 철거'를 다짐했지만, '헌장 파기'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추후 면밀히 관찰해야 할 대목이다.

칼린‧헤커의 전면전 경고에 대한 반박과 이견은 전쟁과 연결점이 약하다는 지점에서 멈춘다. 올해 한반도 안보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는 전망은 달라지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공격적인 군사행동을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해석,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북한의 '안중'에 한국은 없어 보인다. 김여정 당중앙위 부부장은 2022년 8월 18일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못 박은바 있다.  

미국은 피하는 북한 자극발언

되레 총선과 연계해 호전적 분위기를 띄우는 정부의 대북 태세가 긴장 고조의 한 축이다. 이점, 한미 동맹이 억제력의 최면에 걸려 있다는 이들의 경고는 유효하다.  최면에 걸렸어도 차이는 있다. 미국은 대북 강경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11월 미국 대선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을 높이려는 북한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된다. 섀퍼는 "북한이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기대하는 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선호하지만, 다른 공화당 후보가 당선돼도 북미 대화를 이어갈 두 번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그는 "북한이 대선 이후까지 긴장을 계속 높인 뒤 공화당 대통령과 마주 앉아 제재 철회와 핵보유국 인정을 토대로 한 군축회담, 주한미군의 철수 등을 논의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병철 경남대 교수도 "미국 대선을 의식한 북한의 긴장 고조 책동이 우리 예상을 뛰어 넘을 것 같다"라면서 "올 한해가 아주 위험한 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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