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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피습사건이 소환한 '야인 신원식'의 '모가지 발언'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1. 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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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비록 매국노였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이완용과 비교도 되지 않는 5000년 민족사의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가 문재인이다." 신원식 예비역 육군 중장이 2019년 8월 24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주관 집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한 달 뒤 9월 21일 부산 태극기 집회에서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간첩"이라고 지칭하며 "문재인 모가지 따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같은 해 유튜브 방송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악마"라고 칭했다.

"노무현은 악마"

지난해 윤석열 정부의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된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일명 '모가지 발언'이 뒤늦게 물의를 빚자, 국회 서면 답변서에서 "야인 시절 개인 신분으로 일부 과한 표현을 했다"는 말을 해명이랍시고 내놓았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발언 역시 '일부 과한 표현'에 대해서만 유감을 표했다. 내 뱉은 말은 물과 같다. 일단 쏟아내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초야에 묻힌 거사를 연상시키는 '야인'과 거리가 멀다. 2019년 1월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장성단(대수장)을 결성해 본격 활동에 나선 반(半) 정치인이었다. 태극기 집회와 극우 유튜브 등 온·오프라인에서 전투적 연사로 활약한 공로를 톡톡히 인정받았다. 2020년 5월 제21대 국회의원(미래통합당)으로 금배지를 달았고, 지난 해 10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여기까진 성공 스토리다.

기자가 '개인 자격'으로 새삼 그의 '모가지 발언'을 소환하는 것은 지난 2일 발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피습 사건 때문이다.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확인된 사실은 범인 김모(67)씨가 살해 의도가 있었고, 칼을 구입해 범행 용도로 개조했다는 점이다.

동영상으로 범행 장면을 돌려보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김모 씨는 지지자를 가장해 접근한 뒤 야수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이 대표의 목을 찔렀다.

사회 극단화 조장하는 유력인사의 '혀'

사건이 발생하자 보수언론은 새삼 안타까움을 표하고, 증오의 확산을 우려한다. 동아일보는 4일 자 1면 머리기사에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극단적 내용의 정치 유튜브와 SNS 문화가 만들어낸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가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집단극화'는 개인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현상이라고 한다. 공감이 간다.

한국 사회가 극과 극으로 갈려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총체적인 혼란상을 보여 온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럴 때 기성 언론의 프레임은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의 막말을 병렬배치한 뒤 "이러면 안된다"고 개탄하는 식으로 짜인다. 종종 외부 기고문이나 전문가 좌담 형식으로 우려를 소개한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야당 지도자 테러를 이리 소비할 수는 없다. 그 과정에 빠진 게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말을 내뱉은 이의 이름과 권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저잣거리의 장삼이사가 한 '모가지 발언'과 수도방위사령관과 합동참모본부 차장을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대수장' 공동대표가 내뱉은 말은 무게가 같지 않다. 파급력도 다르다. 이번 사건을 일탈한 개인이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몰고 가선 안 되는 까닭이다.

한국사회에 미세먼지처럼 떠도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궁극적인 결과이자, 음울한 미래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신원식 예비역 장군이 태극기 집회와 유튜브에서 한 언행은 극우 포퓰리즘의 글로벌 탁류에 닿아 있다.

신원식 합참 작전본부장이 1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에서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군의 대응과 관련한 질의에 답하고 있다. 2014.10.13. 연합뉴스

공포·원한·친밀감의 '치명적 칵테일'

이스라엘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는 공포와 원한, 친밀성 등 세 가지 감정을 정치에 동원한다. '공포'는 상상 속에 적을 만들어낸다. 미국은 이민자에 대한 공포가, 유럽에선 난민과 무슬림에 대한 공포가 팽배하다. '원한'은 '결코 채울 수 없는 복수욕'이다. 2016년부터 글로벌 극우 포퓰리즘 현상의 핵인 도널드 트럼프는 라티노와 무슬림, 여성에 대한 원한을 십분 활용한다. 마지막이 '친밀성'이다. 사회 지도자와 하나의 공동체와 관계망을 만드는 도구다. 이럴 때 유명인의 한마디는 진실로 둔갑하고, 사람에 따라 신념이 되며, 행동으로 발현된다.

그런데 정작 말을 내뱉은 엘리트 장본인은 결코 행동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2020년 1월 6일 연방의사당 폭동 당일 트럼프의 언행이 본보기다. 폭동 전 트럼프는 '미국을 살리는 집회(Saving America Rally)'에서 지지자들에게 "대선 결과 도둑질을 중단하라(Stop the Steal)"라면서 의회에 대한 증오를 심었다. 방관하면 "미국이 망할 수 있다"는 공포도 조장했다. 그러나 본인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트럼프는 "모든 사람들이 곧 의사당으로 행진해 평화적으로, 애국적인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슬쩍 집회를 빠져나왔다. 그즈음 시위대 2000여 명이 폭도로 돌변, 의사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신원식 예비역 장군뿐이 아니다. 사회적 명망가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태극기 집회나 증오를 조장하는 아스팔트 집회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게 한국 사회의 관행이 된 지 오래다. 그 후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

트럼프 현상은 지배 엘리트들의 반동의 정치가 돌아오고 있다는 징표다.

"힐러리를 감옥에"

정치군인은 정치 후진국 어디에건 있다. 겉으로는 세계 민주주의를 걱정하지만, 정작 안에서 곪고 있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국방정보국(DIA) 국장을 역임한 예비역 중장 마이크 플린도 후한 보상을 받았다. 트럼프를 그를 초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다. 퇴역 뒤 2016년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 집회에 자주 마이크를 잡은 덕이다. 주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를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그가 선거판에서 한 가장 심한 '극언'은 "내가 힐러리가 한 짓의 10%만 했어도 지금 감옥에 있을 것"이라면서 "그를 가둬라(Lock her up)"고 말할 정도였다. 버락 오바마 전대통령에 대해서는 "공허한 연설과 잘못된 수사에 신물이 난다"면서 증오를 확산했다. 이 정도 말로도 미국 언론의 숱한 비난을 받았지만, 현역 장성이 아니었기에 상원 인준청문회를 거치지 않고 취임할 수 있었다.

'플린이 오바마와 클린턴을 비난한 이유도 신 장관과 마찬가지로 정책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국방정보국(DIA) 국장 시절 오바마 행정부의 대테러정책에 날선 비판을 해왔다. 군장성이라도 정부 정책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퇴역 뒤 정치꾼으로 돌변해 '일부 과한 표현'으로 군중을 선동하는 짓은 궤가 다르다. 1·6 의사당 폭동이 일거에 미국을 정치 후진국으로 만들었지만, 다행히 미국 사법제도와 펜타곤 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플린이 취임 25일 만에 해임돼 '최단기 국가안보보좌관' 기록보유자가 된 것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주미 러시아 대사와 한 통화 내용 때문이었다. 플린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대러 제재가 풀릴 것을 암시했다. 민간인이 적대국과 분쟁사안 논의를 금지한 '로건법' 위반 사실이 드러났다.

마이크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3일 백악관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한때 촉망받는 장군이었지만, 퇴역 뒤 '정치군인'으로 변신해 선동적인 말을 내뱉다가 결국 취임 25일 만에 해임됐다. 2017.2.13. AP 연합뉴스

퇴역 장성이 야인이라는 억지

플린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미국 사법기관이 총동원됐다. 연방수사국(FBI)은 감청 내용을 보고했고, 법무장관 대행이 공식경고를 했으며, 전 국가정보국(DNI) 국장과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결과다. 퇴역 뒤 '야인'이자 개인' 자격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행사장에 참석했을 때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DIA는 퇴역 장군이라도 통장 계좌의 변화를 들여다 본다. 대선 과정에 전·현직 간부들에게 "선거판에 끼어들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동아시아 분단국에서처럼 군복을 벗자마자 외국 방산업체의 세일즈맨으로 돌변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게다. 미국 사법기관과 국방부가 퇴역 장성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꼼꼼히 감시하는 것은 그들을 '야인'이나 '개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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