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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거짓말 같이 소멸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그러나...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12. 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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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2023년 발생한 가장 극적인 지정학적 사건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지구 사태가 아니다. 35년 동안 피의 보복이 계속됐던 남캅카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소멸이다. 소련 해체와 함께 가장 먼저, 가장 격렬하게 불거졌던 민족분쟁이 소멸된 과정은 마법과 같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7일 자동차에 짐을 가득 싣고 고향을 떠나 아르메니아 남부 이우니크 지방에 도착하고 있다. 2023.12.7. AP 연합뉴스

지난 9월 아제르바이잔군의 공격 사흘 만에 아르메니아 및 나고르노-카라바흐(이후 카라바흐)의 자치정부 아르차흐(Artsakh) 방위군이 항복했다. 방위군은 무기를 내려놓았고, 아르메니아군은 두 차례의 전쟁과 잦은 분쟁 과정에 얻은 아제르바이잔 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새해 1월 1일을 기해 아르차흐 공화국은 자진 해산한다. 화해로운 종결과는 거리가 멀다. 2020년 제2차 전면전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아르메니아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자,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이다. 지정학적으론 러시아가 쇠퇴하고 튀르키예의 입김이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래한 변화이기도 하다.

사흘 만에 종결된 35년 분쟁

카라바흐의 운명은 지난 9월 단 사흘 만에 결정됐다. 19일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대테러 작전'을 명분으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러시아의 중재로 곧바로 종식됐다. 20일 휴전한 뒤 다음 날부터 평화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의 주역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및 러시아 정부. 삼국 정상이 11월 10일 자로 발표한 공동성명은 외견상 '러시아의 망토' 안에서 평화를 명토 박았다.

이날 0시를 기해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하고 아르차흐 방위군을 비롯한 아르메니아계 무장 단체는 아제르바이잔 정부군에게 무기를 내놓고 해산키로 했다. 아르메니아는 점령하고 있던 아그담(11월 20일까지)과 켈바자르 지방(11월 15일까지)에서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마지막 라친 지방에선 12월 1일 철군했다.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잇는 라친 통로는 2차 전쟁 이후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관리해 왔다. 공동성명은 러시아군의 주둔을 5년 연장하고 3년 내 라친 통로에 새 도로를 건설키로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 주민과 아르메니아 간 인적 왕래와 통신, 물자 이동의 안전을 보장키로 했다. 포로 석방 및 교환도 이뤄지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떠난 아르메니아계 피란민 차량들이 25일 산악지방의 도로를 통해 아르메니아로 탈출하고 있다. 2023.9.25. 로이터 연합뉴스

카라바흐 지방의회가 1988년 아르메니아 귀속을 요구하면서 벌어진 소요와 1차 전쟁(1992~1994), 2차 전쟁(2020년 9월~11월). 수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분쟁이 공식 종결된 것이다. 그 사이 마법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체 12만 명에 달하는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의 모두 고향을 등지고 아르메니아로 탈출했다. 이는 아르차흐 공화국 삼벨 샤흐라마냔 국무장관(사실상 대통령)이 정부 해산 포고령에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남거나, 떠나거나 각자 결정하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10월 2일 자 성명에 따르면 적게는 5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아르메니아인이 남았을 뿐이다. 아르차흐의 수도 스테파나케르트를 비롯한 주요 지역을 현지 조사한 결과다.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고향을 등진 것은 아제르바이잔에 의한 인종청소 공포 때문이다. 서울시 면적의 7배가 넘는 면적(4400㎢)의 카라바흐는 난민이 귀환하지 않는 한 아제르바이잔군이 통제하는 거대한 유령의 땅이 됐다.

고립무원의 아르메니아

얼핏 보면 거짓말처럼 소멸된 분쟁은 3단계 '버림'의 결과다. 우선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버렸고, 아르메니아는 30여 년 동안 사실상 역외영토였던 아르차흐를 포기했으며, 아르차흐 정부는 다시 주민을 방기했다.

아르메니아는 1차 전쟁에서 카라바흐는 물론 아제르바이잔 7개 주를 점령했지만, 14년 뒤 2차 전쟁에선 점령지 대부분을 잃었다. 아르메니아군은 6주 동안의 2차 전쟁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아르메니아는 유전에서 길어 올린 부로 경제적, 군사적 힘을 키운 아제르바이잔에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2차 전쟁 뒤에도 주로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군사력을 한층 강화했다. 두 번째 요인은 러시아의 배반과 지정학적 구도의 변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분쟁지역. 왼쪽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내 나르차흐 자치공화국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이지만 러시아는 2021년과 2022년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개입하지 않았다. CSTO는 조약 4항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조약 5항과 같은 집단방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지난 5월 22일 아제르바이잔 국경에 다시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자 CSTO 탈퇴 의사를 밝혔다. 동시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포함된다"면서 포기 의사를 밝혔다.

아르메니아는 지리적으로도 고립됐다. 동서남북으로 튀르키예·아제르바이잔·이란·조지아에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이중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계 형제국으로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과 함께 아제르바이잔의 주요 군사협력국이다. 이란 및 조지아와도 관계가 원활하지 않다. 그렇다고 나토와 유럽연합(EU) 등 서방이 적극 손을 내미는 것도 아니다. 

카라바흐 포기로 인해 수천 명의 시위대가 파시냔의 실각을 요구하는 등 국내의 정치적 압력마저 높아지고 있다. 파시냔은 삼국 공동성명 발표 뒤 "우리 국민과 개인적으로 내게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라면서도 "현 상황에서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역설했다.

나흐치반, 더 큰 분쟁의 불씨

아르메니아가 카라바흐를 포기한다고 해도 남캅카스 지방에 평화가 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르메니아 내 아제르바이잔계 나흐치반(Nakhchivan) 자치공화국으로 민족 분쟁의 화약고가 옮겨 갈 우려가 거듭 제기되고 있다. 카라바흐보다 약간 넓은 면적(5502㎢)이다. 삼국 공동성명 9항은 아르메니아가 나흐치반~아제르바이잔 간 운송과 통신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운송·통신에 대한 통제권한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S)에 위임했다. 

공동성명의 내용은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항복문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 점령지에는 철군 일정까지 명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이 2022년 공세로 확보한 제르묵(Jermuk)을 비롯한 아르메니아 내 점령지 문제는 담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이 오래전부터 요구해온 나흐치반과의 연결통로 건설 문제도 포함하지 않았다.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된다면 길은 분명 평화와 번영의 수단이다. 하지만 힘의 불균형 상태에선 분쟁의 원인이기도 하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최근 들어 "아르메니아는 '서부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자국과 나흐치반 사이에 메그리 회랑 구축을 명분으로 영토 야욕을 내보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이 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아르메니아 정부는 맞설 역량이 없다. 아르메니아 남부와 이란 북부 사이의 메그리 회랑에는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이해도 걸려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 전쟁 이후 교역이 늘어난 튀르키예와의 추가 통로를 원한다. 튀르키예는 형제국 아제르바이잔과 연결통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중앙아시아와 중국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다. 레셉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 통로의 개통을 촉구한 이유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대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의 한 건물 지하에 20일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현지의 인권 옴부즈만이 배포한 사진이다. 2023.9.20. AFP 연합뉴스

유럽외교협회(ECFR)의 마리 두물랭 국장과 구스타프 그레셀 선임 정책위원은 11월 24일 자 보고서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추가 공세에 대비해 유럽이 아르메니아에 군사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신무기 지원에서부터 군사훈련, 국방 행정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것을 감안해 EU 가입후보국 지위인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이어지는 지원 통로를 개설할 것도 제안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올렉시야 바르탄얀도 12월 8일 자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상당한 군사력을 갖춘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메니아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것은 며칠도 아닌, 몇 시간 교전으로 가능할 것이라면서 나흐치반 문제의 심각성을 거론했다. 바르탄얀은 "지난 9월 아제르바이잔군의 카라바흐 장악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도 스테파나케르트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면서 종료됐다"면서 "휴전 두 달 만에 주민 대부분이 피난길에 오른 것 역시 더 큰 전쟁의 발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는 까닭

카라바흐 사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부산물이다. 러시아는 2020년 이후에도 남캅카스의 안정을 도모해 왔지만, 우크라 전쟁 이후 관심을 돌림으로써 진공상태가 생겼다. 아제르바이잔이 그 틈새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게 대세를 가른 것이다. 아르메니아 처지에선 러시아의 배반이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관심 지역의 이동이다.

20일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도심에서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벌인 군사작전에 대해 항의하는 주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2023.9.20. AFP 연합뉴스

우크라 전쟁 전까지 러시아와 서방은 남캅카스의 안정에 협력해 왔다. 지난 9월 충돌이 벌어진 뒤에도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은 몇 차례 대화 통로를 재개했다. 서방은 우크라 전쟁 뒤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를 사갈시해 왔지만, 정작 러시아 세력권 안에서의 무질서를 우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번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8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자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평화협정 논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와 이후 메그리 통로를 둘러싼 긴장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남캅카스는 역사적으로 러시아·튀르키예·이란이 충돌해 온 지역이다. 이스라엘이 아제르바이잔과 관계를 강화해 온 것은 이란을 겨냥한 포석이다. 튀르키예는 튀르크국가기구(OTS)를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뒤 러시아의 영향력이 느슨해진 남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 위치를 강화하고 있다. OTS는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튀르크어 사용국 간 연합으로 2009년 설립을 공표한 곳이 바로 나흐치반이다. 2024년에도 주목할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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