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긍정적인 상호교섭을 재개할 길은 없다. 일본은 러·일 관계를 최종적으로 파괴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긴장을 고조하는 적대시 정책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자국의 국익만 고려하면서 '가장 가혹한 대응조치'와 일본에 민감한 움직임으로 답할 것이다. (19일, 러시아 외교부)"
미국에 휘둘려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독자 제재도 부과했다.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일이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듯 미국과 연합훈련의 횟수와 강도를 높였다. 동아시아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과의 연합훈련도 벌인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한국과 일본이 해온 일들이다.
러시아는 두 나라를 나란히 '비우호국' 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대하는 러시아의 입장은 판이하다. 마리아 자하로바 외교부 대변인이 밝힌 입장은 외교적으로 최고 강도의 표현이었다. 선전포고를 연상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준비된 발언을 내놓았다. 질문은 가미카와 요코 신임 일본 외무상이 지난 18일 유엔 총회를 계기로 뉴욕에서 발표한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성명에 대한 논평 요구였다. 일본 자체의 정책을 표방한 게 아니라 G7 외교장관 회의 의장 자격으로 종합해 내놓은 성명이었다.
성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다짐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몇 차례 내놓은 핵무기 사용 경고도 도마에 올렸다. 여느 서방 국가들이 거의 습관처럼 반복해 온 입장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왜 유독 일본에 대해 '가장 가혹한 대응조치'를 경고했을까. 같은 정례브리핑 자리에서 북·러 군사협력을 가정해 러시아에 강한 경고를 내놓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반응에 비교해도 몇 단계 강도가 높은 입장이었다.
자하로바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특별군사작전 이후 워싱턴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르면서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정책을 공개적으로 추구해 왔다. 더 많은 불법적 제재의 패키지들도 포함된다"고 지적한 내용은 한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럼에도 북·러 군사협력을 예단한 윤 대통령에게 "궁금하면 물어보지 왜 마이크부터 잡나"라고 반박하면서도 정제된 표현으로 "외교적 교섭이 답"이라고 말한 것과 차원이 다른 접근이었다. 한·일에 대한 러시아의 상이한 대응을 이해하는 것은 러·일 간에 고조돼 온 군사적 긴장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 무대가 동해이기에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반도 안보의 현주소를 보다 정확하게 읽으려면 지도를 넓게 읽어야 한다. 분쟁 소지를 안고 있는 경계선은 남북 군사분계선(MDL)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 수교 이후 러시아는 한국에 안보상의 위협이 된 적이 없다. 되레 자산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북핵 6자회담의 일원으로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를 담보할 안보 체제를 구성하려는 피스메이커의 노력을 보여왔다. 그러나 일본과는 꾸준하게 긴장을 높여왔으며, 그 결과 지난해 일본의 국가방위전략서는 중국과 북한에 이어 러시아를 3대 위협으로 명시했다. 한·미·일의 8·18 캠프 데이비드 합의 이후 국내에서 가장 먼저 나온 비판의 하나는 중·일 간 센카쿠열도/조어도 영유권 분쟁에 한국이 연루될 위험이었다. 러·일 간 동해상 분쟁에 연루될 위험은 간과된 측면이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를 도발하는 방식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전쟁 직후인 지난해 3월 7일 "(러시아) 쿠릴 열도 남쪽 영토는 일본 주권에 속하는 고유 영토"라고 선언했다. 반러시아, 친우크라이나 정책에 더해 전쟁을 틈타 쿠릴 열도 영유권 주장을 다시 늘어놓은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부터 미·일이 한반도 주변에서 벌이는 연합훈련이 지역 안정을 해친다면서 경고해 왔다.
한국에 서해가 분쟁의 바다였다면, 동해는 오랫동안 평화의 바다였다. 북한과 몇 차례 교전을 벌인 데다가 중국의 일방적인 해상 경계 주장 탓에 긴장이 감돌았던 서해와 달리, 동해에선 아직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 온 일본과 잠재적 충돌 가능성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중, 미·러 대치가 심화하면서 한·미·일 군사훈련의 무대가 되고 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러시아의 답은 군사훈련이었다. 러시아와 중국 해군은 지난해 20년 만에 가장 많은 6차례의 연합훈련을 한 데 이어 올해도 해·공군 합동 순찰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 함대는 지난 4월에도 2만 5000명의 장병과 167척의 군함, 12척의 잠수함, 89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동해상에서 연례 훈련을 했다. 일본 열도를 한 바퀴 도는 항해도 해왔다. 지난해 6월 15일부터 규슈와 쓰시마 사이의 대한해협 동수로를 거쳐 센카쿠열도/조어도를 지나 일본 열도를 한 바퀴 돌았다. 2021년에는 러·중 함정 10척이 역시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을 지나 일본 동쪽 바다로 나간 뒤 규슈 인근 오수미 해협을 통과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 아니듯이 러·일, 중·일이 해상에서 높이는 군사적 긴장은 한국과 큰 관련이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한·미 동맹에 더해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및 정례 훈련을 약속한 캠프 데이비드 합의 이후 동해에서 벌어질 러·중과 미·일의 대치에 자발적으로 연루됐다.
일본은 우리와의 독도, 중국과의 센카쿠/조어도,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동아시아에 분쟁의 씨앗을 제공해 왔다. 영토주권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에 맞대응하면서 강한 태도를 보인다. 한국은 되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독도영토수호 훈련을 소규모·비공개로 전환해 지난 6월 말 치렀다. 반면에 하필 국치일이던 지난 8월 29일 제주 남방 공해상에서 미·일 해군과 함께 북한 핵·미사일 대응 연합훈련은 공개했다.
북핵은 분명 한국에 가장 중요한 위협이다. 그러나 북핵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더 범위가 넓은 지정학적 분쟁에 뛰어드는 것은 그만큼 위협을 늘리는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 외교부의 강경한 대일 입장을 접하며 불안해지는 동해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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