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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장소? 오래전 빛 바랜 캠프 데이비드의 '허명'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8. 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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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당사자가 빠진 어떠한 회담도 역사가 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남한 대통령이 아니다. 북한 지도자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까닭은 북한이 먼저 행동한 뒤에나 움직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행동해 볼 필요가 있다. 공식 의제 없이 지도자끼리 허심탄회하게 만나기에 캠프 데이비드는 이상적이다. 서로 넥타이를 풀고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 북한이 거부하더라도 이러한 제안을 함으로써 미국이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중앙) 중재로 평화협정에 합의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위키백과

미국 대통령 가족의 '사적 공간'

캠프 데이비드는 미국 대통령의 주말 별장이다.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는 메릴랜드주 캐톡틴 산 숲속에 있다. 국가 재산이되 대통령 가족의 사적 공간이다. 미국 대통령과 부인은 언론의 감시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캠프 데이비드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생활의 은밀함을 보장하는 장소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이곳을 공개 추천한 이는 칼 포드 전 국무부 차관보이다.

포드 전 차관보는 2008년 5월 13일 워싱턴의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토론회에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며 캠프 데이비드 북·미 정상회담을 권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4월 18일)이 열린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은 그야말로 상상의 영역이었다. 포드가 이러한 발상을 내놓은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캠프 데이비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 시설이던 캠프 데이비드가 대통령 별장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이다.

애초 '샹그릴라(낙원)'이란 별장의 첫 입주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53년 별장 이름을 손자의 이름(데이비드)으로 개명했다. 이후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이름을 고치지 않은 까닭은 가족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사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조지 H. 부시는 딸 도로시의 결혼식 장소로도 사용했다.

백악관에서 북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미국 대통령 주말 별장 캠프 데이비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자신의 손자(사진)의 이름 데이비드를 따서 현재 이름으로 고쳤다. 미국 문서보관소

샹그릴라에서 캠프 데이비드로

캠프 데이비드는 종종 외교무대로 사용됐다. 가족의 사적 공간에 초청하는 것 자체가 각별한 환대임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회담보다 밀담의 장소였다. 산책과 승마, 골프 등 여가를 함께 보낼 시설도 충분했다. 해서 초청객은 아주 가까운 사이이거나, 정색하고 만나기에 껄끄러운 상대였다. 전자의 경우가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 호주, 캐나다 총리들이었다면, 후자의 대표적 경우는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1959)이었다. 흐루시초프는 이틀 동안 머물며 아이젠하워와 밀담을 나눴다. 제럴드 포드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부부를 초청했다. '아들 부시'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청해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기지 문제를 논의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캠프 데이비드식 회담'의 모델을 만든 건 지미 카터였다. 1978년 9월 17일 카터가 초청한 이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었다. 이들은 통나무집 숙소에 12일 동안 머물면서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합의(Accords)'를 일궈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이듬해 3월 26일 카터의 입회하에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넥타이를 매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았을 회담 탁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국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이후 엉켰던 적대관계를 풀었고, 수교로 이어졌다. 사다트는 베긴과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지만, 3년 뒤 암살됐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철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지금까지 유대인 정착촌을 계속 건설해 점령을 영속화했다.

지미 카터가 창조한 '회담 모델'

그러나 이집트 내에서 평화협상에 대한 불만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평화협정을 맺고도 항구적인 평화가 없는, '차가운 평화(Cold Peace)'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빌 클린턴은 2000년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초청해 회담을 열었지만, '캠프 데이비드 효과'는 없었다. 2000년 7월 11일부터 25일까지 13박 14일 회담을 열었지만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차가운 평화'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18일 미국 메릴랜드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 조지 W. 부시 대통령 옆에서 영내 이동용 골프 카트를 운전하며 활짝 웃고 있다. 2008.4.18. 연합뉴스

포드가 북·미 회담 장소로 꼽은 까닭은 '중동평화 합의' 도출 이후 캠프 데이비드가 갖게 된 '회담 모델'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입하자면,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종전선언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항구적인 중동 평화협정으로 가는 '입구'가 됐기 때문이다. 포드의 말대로 '캠프 데이비드 회담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려면 남북한 지도자와 미국 대통령이 함께 만나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북한 지도자를 초청하지도 않겠지만, 윤석열 정부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자유총연맹 연설에서 전 정부의 종전선언 추진을 두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을 노래 부르고 다닌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김정일, 김정은 위원장이 대를 이어 통일 뒤에도 미군의 한국 주둔을 용인하는 발언을 했던 팩트는 깡그리 무시했다. 김영호 신임 통일부 장관과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잇달아 "윤석열 정부는 종전선언을 절대로 추진하지 않겠다"며 대통령의 생뚱맞은 '저주'를 복창했다. 희망이 없다.

허명만 남은 '캠프 데이비드 모델'

2000년 클린턴의 중동평화협상이 무산된 것을 기점으로 회담 모델로 '캠프 데이비드'의 특수한 지위는 사실상 종료됐다. 남은 건 숙박·편의·경호상 편리한 시설뿐. 이후 평범한 정상회의의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가 2012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장소로 활용한 게 대표적이다. 러시아에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참석한 회의였다. 흐루시초프에서부터 푸틴까지 소련 및 러시아 지도자들이 다녀갔지만, 어려운 이슈를 풀어내는 느슨한 회담 모델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역시 캠프 데이비드의 허명을 빌어 2020년 6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장소로 정했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무산됐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의 흔적은 이제 '역사적(historic)'이라는 형용사에만 남았다. 그럼에도 각국 언론은 그곳에서 회담하면 거의 습관적으로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남용이다.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악수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전날 화상 브리핑을 통해 이번 회담에서 3국의 군사 협력 강화와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한 대응을 논의한다고 밝혔다. 2023.05.21. AP 연합뉴스

캠프 데이비드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했던 포드는 평생 미 국방부와 국무부에서 재직한 정보 전문가이다. 기자는 북·미 정상이 그야말로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2018년 5월 은퇴생활 중이던 그를 전화로 호출했었다. 모두가 역사적 희망에 들떠 있을 때 정작 북·미 정상회담을 그 10년 전부터 제안했던 그의 반응은 차가우리만큼 차분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이 희박하고,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상한 이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제안했던 2008년만 해도 다단계 협상으로 북핵 문제의 해결이 가능했지만, 2018년엔 물 건너갔다는 현실 인식이 깔린 전망이었다.

'북한' 빠진 어떤 회담도 역사가 될 수 없다

오바마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해내겠다는 트럼프의 욕심과 미래 핵을 포기하더라도 현재 핵을 지키려는 김정은의 욕심이 충돌할 것이 뻔하기에 기대할 게 없다는 그의 분석은 적중했다.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을 무대로 몇 장의 인상적인 사진을 남겼을 뿐 에피소드로 끝났다. 우리에게 '새로운 미‧북 관계'를 떠벌렸던 트럼프의 장광설은 "우리가 손을 내밀 테니 당신들도 주먹을 펴라"는 오바마의 번드레한 말(2020년 1월 취임사)과 다를 게 없다. 캠프 데이비드는 트럼프와 오바마가 못한 것을 해내는 산실이 돼야 비로소 역사적인 장소가 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오는 18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초청해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연다. 중동평화 협상과 비교하면, 이스라엘·미국·영국 지도자만 참석해 아랍권을 상대로 어떠한 군사협력을 할 지 논의하는 셈이다. 캠프 데이비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굳이 북한을 집어넣은 이유가 있다. 캠프 데이비드가 명성을 얻은 것은 평화로의 담대한 여정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차가울지언정 평화를 낳았다. 이를 평화협정으로 제도화했다. 한·미·일 회의의 목적은 평화가 아니다. 대북·대중 군사협력의 제도화이다. 장소부터 잘못 택했다. 대선 유세 중인 바이든이 삼국 관계의 ‘새 장(a new chapter)’을 여는 어떤 화려한 언사를 쏟아내도 귀 기울일 대목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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