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이견이 있음을 인정하기(agree to disagree).’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이뤄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지난 16일 제네바 미·러 정상회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상대를 인정하며 공존할 것인가, 계속 갈등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일단 ‘공존’ 쪽으로 선회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정치도, 외교도 결국은 중간쯤에서 접점을 찾는 노력일 터. 당장 점을 찾기 어려우면, 선(red line)을 긋고 각각의 DNA를 인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야 비로소 긍정의 영역을 더불어 탐사할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취임한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과 관련해 내놓은 공식 입장은 ‘경쟁’과 협력의 병행이었지만, 지난 5개월 동안 외교행보는 중국 포위에 굵은 방점이 놓였었다. 바이든이 그동안 만났던 상대는 대부분 ‘비슷한 생각의 나라(like-minded country)’의 지도자였다. 미·일 및 한·미 정상회담은 물론 주요 7개국(G7)+3(한국·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회의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때마다 중국에 대한 공동전선을 다지는 계기였다. 푸틴은 그가 처음 대면한 경쟁자 또는 적국의 지도자였기에 회담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지난 3월 푸틴을 두고 ‘살인자(killer)’라고 공언했던 바이든이 아닌가.
미·러 간에는 난제가 많다. 러시아에 구금된 야당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문제와 벨라루스 인권 상황,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및 우크라이나 동부 사태, 미국 선거에 대한 러시아의 온라인 개입 혐의 등. 하나같이 녹록지 않은 난제들이다. 바이든은 회담에서 푸틴이 껄끄러워하는 모든 문제를 당차게 따지고, “필요하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회담 뒤 모스크바에는 때아닌 봄기운이 완연하다. 미·러관계에 긍정적 시각도 팽배해졌다. 대체 제네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바이든의 외교 마술은 ‘(미국과 러시아) 두 개의 강대국(two great powers)’이라는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경륜의 바이든은 이 말을 각국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푸틴과의 정상회담 모두발언으로 내놓았다. 바이든은 “우리는 (회담에서) 서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인 길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라는 말끝에 “두 개의 강대국”을 배치했다. 푸틴의 머리에서 ‘꼬마전구’가 반짝 켜진 순간이었을 거다. 바이든의 미국이 러시아를 “기껏해야 지역강국(regional power)”이라며 업신여겼던 오바마의 미국과 작별했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풀을 뜯어먹더라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푸틴의 말을 변용하면, 풀을 뜯어먹을지언정 자존심 상하는 건 참지 못하는 게 러시아다. 바이든 말대로 미국이건, 러시아건 지도자는 유권자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 슈퍼파워 향수를 갖고 있는 러시아 유권자들은 푸틴이 보이는 강대국 행보 만큼은 90% 가까이 지지한다.
바이든이 회담 뒤 단독기자회견에서 소개한 푸틴과의 대화 내용 역시 지극히 완곡했다. 바이든은 “어떤 미국 대통령도 민주주의 가치들과 보편적 인권 및 기본적 자유를 말하지 않고 미국민들에게 믿음을 유지할 수 없다”면서 “그러한 가치들은 우리 DNA의 일부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나발니와 러시아 인권에 대한 미국 입장을 밝히면서도, “인권침해를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내가 미국 대통령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고, 이와 다른 러시아를 비난하되 그러한 비난은 미국민을 향한 ‘대내용 메시지’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나발니와 관련한 기본적 인권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그게 미국이기 때문”이라며 이해를 구했다. 러시아가 억류한 2명의 미국인 문제도 지적했다. 집권 뒤 5번째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경륜의 푸틴이 이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을 터.
바이든은 인권뿐 아니라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을 지적하면서 송유관을 비롯한 에너지·용수 등 필수적인 인프라 16개 분야에 대해 어떠한 사이버 공격도 서로 하지 말자며 리스트를 건넸다. 회담에선 이해가 일치하는 대목이 더 강조됐다. 북극 개발과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을 지지한다면서도 민스크협정에 토대를 둘 것임을 분명히 했다. 푸틴 역시 별도 회견에서 민스크협정 준수 수준에서 더 이상 이견이 없었음을 밝혔다. 민스크협정은 2014년 9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중재하에 러시아와 러시아계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PR)이 즉각적인 교전 중단에 합의한 협정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통합된 크림반도 문제는 담지 않고 있다. 벨라루스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었다고만 전했다.
바이든과 푸틴이 전한 회담 분위기는 1970년대 미·중 간 데탕트를 열었던 상하이 코뮈니케처럼 같음을 구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연상케 했다. 러시아 제안으로 정상회담 뒤 각각 별도 회견을 가졌지만 양 정상은 회담이 좋았고, 긍정적이었으며, 생산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푸틴의 회견 내용 역시 구동존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 문제와 관련해 민스크협정이 토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관해선 “그 문제를 다루었지만, 토론할 게 없는 문제”라며 러시아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이버 공격은 미국과 캐나다가 가장 많이 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까지 미국은 러시아에 러시아 발 사이버 공격과 관련해 12번 문의를 해왔지만, 러시아는 미국 발 사이버 공격과 관련 80번 문의했음을 지적했다. ‘살인자’라는 대목에선 이라크에서 민간인을 살상하는 미국의 드론을 거론하고, 인권에 대해선 여전히 테러용의자들을 불법 구금하고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상기시켰다. 그러나 쟁점에 대한 러시아 입장을 밝히면서도 직접적 비난을 삼갔다. 푸틴은 “단언컨대, 바이든 대통령은 경륜 있는 사람(an experienced person)”이라며 “모든 지도자와 2시간여 동안 얼굴을 맞대고 구체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투는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간결했다.
회담이 남긴 공식 합의문은 단 세 단락으로 된 ‘전략적 안정에 관한 미·러 대통령 공동성명’ 한 장이었다. 지난 2월 합의한 신전략무기감축협정(STARTII) 연장을 확인하고, 핵전쟁 위협을 감소할 것을 다짐하는 데 그쳤다. 중요한 것은 미·러 정상이 양국 국방·외교 장관 등이 참여하는 ‘통합된 양자 간 전략적 안정 대화’의 회의체 구성 및 가동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바이든과 푸틴은 공히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What’s next)”라고 강조했다. 바이든은 “3개월이나 6개월 뒤쯤” 러시아와의 협력 정도를 점검, 더 나아갈 것인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푸딩 맛을 알려면,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미국 속담을 인용하며 “곧 알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바이든이 회견에서 털어놓은 말들은 그러나 양국이 핵무기 감축만 논의할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미·러 정상이 관계를 재정립(reset)하는 데 합의한 것은 공동의 적 또는 공동의 경쟁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중국이다. 바이든이 쏟아낸 말을 직설화법으로 갈무리하면 이렇다.
“역으로 묻자, 러시아와 수천 마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이 세계 최강의 경제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제는 지극히 어렵다. 당신이 푸틴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푸틴의 행동이 변할 것이라고 믿느냐고? 상대방의 관심(self-interest)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푸틴과 나는 서로를 알 뿐이다. 굳이 누군가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의 경제적 어려움은 상당 부분 국제유가 하락과 관련돼 있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미국 및 서방의 경제 제재가 목줄을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가 최근 몇년간 중국으로 달려간 까닭 역시 서방의 제재로 어려워진 경제 때문이다. 바이든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활동 재개 가능성을 말하면서 푸틴에게 “미국 기업들의 투자를 바란다면, 생각을 바꾸라(Change the dynamic)”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도합 43분 동안 바이든이 쏟아낸 회견문(A4용지 19쪽)에는 비유가 많다. 사실 확인에 마음이 급했을 저널리스트들은 답답한 상황이었을 거다.
바이든은 회견에서 질문을 받기 전 “이번 회담은 우리(미국과 러시아)가 여기(현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회담”이었다며 오해가 없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푸틴의 행동이 변할 것이라고 보는가’ ‘최후통첩을 던졌나’ ‘어떻게 확신하는가’ ‘푸틴을 신뢰하나’ 등 의심조의 질문이 끊이지 않자 바이든은 결국 역정을 냈다. 마지막 질문을 한 기자에게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직업을 잘못 택했다”고 쏘아붙였다. "푸틴이 행동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제기랄 당신은 그동안(내가 회견하는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나"라고도 말했다. 너무 심한 말이 아니었을까. 바이든은 제네바를 떠나는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오르기 전 약식 회견을 자청하면서 이를 사과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앞으로도 인권과 우크라이나 문제 등에서 이견을 노출할 게 분명하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정상회담 나흘 뒤인 지난 20일 “러시아의 나발니 처우에 대해 더 많은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을 시작으로 미·러관계가 리셋될 것은 분명하다. 바이든의 ‘살인자’ 발언 무렵 각각 본국으로 돌아갔던 이바노프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와 존 설리번 주러 미국 대사가 임지로 복귀한 게 더 중요한 움직임이다.
바이든이 회견 내내 외교교섭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지 못해 답답해 하며 전하려던 변화의 조짐은 베를린에서 일단이 나왔다. 24일자 파이낸셜타임스는 1면 헤드라인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연합(EU)-러시아 관계의 리셋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함께 푸틴을 초청, EU와의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다.
오는 7월16일은 러·중 우호조약 체결 20주년이다. 푸틴이 러·중관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관측하기 좋은 계기다. 중국은 푸틴의 베이징 방문을 희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러관계 리셋에 이은 EU·러관계 리셋.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굳어졌던 국제정치의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만 돌아온 게 아니다. 러시아도 돌아오고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에 움찔해 있던 한·러 경협도 기지개를 켜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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