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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북-러 접경 하산을 가다1. 한국 기다리는 러시아, 북한 기다리는 한국

by gino's 2019. 6. 13.

이 철로가 서울까지 이어진다면… 지난 6일 북·러 접경지역인 러시아 하산역. 광궤와 표준궤 등 7개의 철로가 놓인 하산역에 정차한 무개 화물열차에 석탄이 실려 있다. 오른쪽 내수면 너머로 두만강 철교(조선-로씨야 우정의 다리)의 난간 위쪽이 보인다. 하산 우철훈 선임기자

“그냥 왔었다.” 지난 6일 오후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주(연해주)의 하산역. 역장을 대신해 나온 중년의 역무원 타티아나는 지난 4월24일 하산역에 내려 러시아 땅을 처음 밟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관한 몇 가지 질문에 단 한마디 답변만 내놓았다. 다른 질문엔 입을 닫았다. 전용열차에서 내린 김 위원장은 하산역 앞에서 빵과 소금을 대접받았다.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는 군사지역 특유의 통제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에 오르면 두만강 건너 북한 땅이 보이련만, 역 관계자들은 역사에서 30여m 떨어진 선로 위 육교에 오르는 것만을 허용했다. 육교에선 두만강 위에 놓인 ‘조선-로씨야(북-러) 우정의 다리’의 난간 지붕만 시야에 들어왔을 뿐, 강을 볼 수 없었다. 다리 옆 조-로 친선각 역시 야산에 가렸다. 

 

|‘두만강 다리 건너면’ 하산 

북·중과 닿은 인구 2760명 도시 
도로변에는 유리창 깨진 건물들
무뚝뚝한 하산역 역무원은 
김정은 위원장 방문에 대해 묻자
“그냥 왔었다” 한마디 답변만 

 

열차 시간표에는 하산~두만강역이 오전 11시에 1편, 두만강역~하산은 오후 4시45분에 1편씩 하루 한 번 왕복하는 노선 안내가 적혀 있었다. 소요시간은 2시간30분. 하산~우수리스크를 잇는 열차도 하루에 왕복 1편이어서 하루 4번 열차가 드나들 뿐이다. 한갓진 선로에는 석탄이 실린 무개 화물차량들만 정차해 있었다. 일행이 역 앞을 걸어가던 도중 젊은 러시아인 청년이 다가오더니 한국어로 말을 걸면서 화물열차 사진의 삭제를 요구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말쑥한 차림의 그는 역 근무자가 아니었다. 화물열차의 석탄이 나온 사진이 ‘삭제대상’이었다. 석탄은 산지가 확인되기에 유엔 안보리 제재에 묶여 있는 북한산일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그런데도 삭제를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항. 속초에서 출발한 크루즈선이 정박했던 곳이다.   우철훈 선임기자

 

한 달 남짓 전에 김 위원장 취임 7년 만에 처음으로 북·러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블라디보스토크와 국경도시 크라스키노, 하산 등 프리모르스키주 어디에도 남·북·러 협력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3~4일 블라디보스토크 롯데호텔에서 열렸던 KEB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소장 정중호)와 사단법인 유라시아21(이사장 김승동) 공동주최 ‘동북아 초국경 경제협력 포럼’을 계기로 북·러 국경지역을 돌아보았다. 

 

 

 

국경은 하나의 세계의 끝이자, 다른 세계의 시작이다. 경계선 너머가 늘 그립다. 더구나 하산과 인접한 중국 훈춘, 북한의 두만강 지역은 3국 국경이 만나는 곳이다. 이중, 삼중의 정서가 흐른다. 하산은 북한 측 두만강역과 연결된 러시아 극동지방의 관문이다. 하지만 하산역과 국경도시 크라스키노에는 국경지역 특유의 활기가 없었다. 작년 봄 찾았던 북·중 접경의 단둥 사람들이 양국 또는 남·북·중 간의 교류에 희망을 걸고 있던 것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도시의 활기는 사람에서 나온다. 하지만 북·러 접경지역의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하산으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크라스키노의 2018년 인구는 2760명에 불과했다. 도로변 멀쩡한 건물들도 유리창이 깨진 채 버려져 있었다. 2010년 인구 조사 당시의 3256명에서 더 줄었다. 러시아 극동 9개주의 수도 격인 블라디보스토크 인구도 60만명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 극동지방의 ‘인구’는 ‘항구’와 함께 러시아·중국 관계의 저변에 깔린 민감한 변수다. 

 

|중국 자본이 ‘께끄름한’ 러시아 

중 훈춘 인접한 자루비노항엔 
대형 크레인 2대만 ‘덩그러니’
의도적으로 개발 미루는 듯… 
중국이 리조트 짓고 있지만
낙수효과 적어 한국 진출 원해 

 

러시아가 차이나 머니를 반기면서도 께끄름한 입장을 보이는 까닭은 바로 중국인들이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이 월등한 중국의 진출로 러시아 경제의 자립성이 휘둘릴 것 역시 우려 대상이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훈춘에서 불과 38㎞ 거리인 자루비노는 부동항이다. 동해 진출이 긴요한 중국에 최단거리 항구이건만 러시아는 쉽사리 내주지 않는다. 지난 6일 찾은 자루비노항에는 대형 크레인 2개만이 덜렁 놓여 있을 뿐 방치돼 있었다. 의도적으로 개발을 미루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서너 시간이 걸리는 중·러 통관절차도 중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간소화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동해 진출을 교묘한 방식으로 늦춘다. 

 

북-러 합작회사인 라선 콘트라스의 이반 톤키흐 대표가 지난 4월24~2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셀피 사진을 전해주었다. 그는 김 위원장 환영만찬과 야외 방문행사에 함께 했다.

 

지난 6일 찾은 프리모르스키주 아르촘시 복합 엔터테이너 리조트(IER) 개발 현장에서는 중국 기업이 투자한 리조트 건설이 한창이었다. 연해주 개발공사가 개발 중인 IER은 해안가에 골프장과 카지노, 마리나 스포츠 시설을 갖춘 단지로, 카지노 7곳이 들어선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2022년 완공해 그해 동방경제포럼에 참가할 각국 정상들을 초청한다는 계획이다. 마카오 자본이 먼저 완공한 타이거 더 크리스탈 리조트I은 이미 영업을 시작했다. 마카오(1곳), 중국(2곳), 러시아, 캄보디아, 일본 기업들이 건설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이 중 중국 자본은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공사 현장에는 중국 건설노동자들의 천막숙소 수십 개가 보였다. 중국 자본이 돈을 대고, 중국인이 건설한 뒤 완공되면 다시 중국인 관광객이 이용하는 순환구조로 진출한다. 해당국, 해당 지역에 낙수효과가 적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중국인들의 진출은 가뜩이나 경제력은 물론, 인구가 적은 러시아가 경계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역으로 러시아가 한국 자본의 진출을 애타게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한반도 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잇는 철도와 가스관 연결 등 두 개의 선형(線形) 프로젝트에 극동지방의 미래를 걸었다. 중국의 강한 영향력 속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하산~나진~원산~부산을 잇는 환동해 벨트 개발만큼은 주도권을 쥐려는 게 러시아의 꿈이다. 북한을 경유해 대륙과 연결하려는 한국의 꿈도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북한 비핵화와 대북 체재보장을 논의하는 북·미 협상의 긍정적인 결과를 기다리는 태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한국을 바라보고, 한국은 북한을 바라보는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4월26일 귀로에 점심식사를 한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레스나야 자임카 레스토랑.

 

지난 3일과 4일 초국경 경제협력 포럼에서는 특히 한국의 망설임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러 합작법인인 라선 콘트라스의 이반 톤키흐 공동대표(35)는 “나인 브리지(9-bridges) 논의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다”고 말했다. 

 

나인 브리지 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서 밝힌 구상이다. 북극항로와 조선·항만·가스·철도·전력·일자리·농업·수산 등 9개의 다리를 놓아 러시아와 한국이 ‘동시다발적인 협력’을 이뤄나갈 것을 제안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 구상을 밝혔다. 이 모든 제안과 사업은 청사진 안에만 머물러 있다. 러시아 전문가들이 “말만 무성할 뿐 아무런 행동이 없다”는 볼멘소리를 내놓는 까닭이다. 불만의 핵심은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 뒤 박근혜 정부의 대북 독자제재로 중단된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집중됐다.

 

|멈춰선 한·러 협력 사업들 

한반도 종단·시베리아횡단 철도 
문 대통령이 제안했던 ‘9 브리지’
“말만 무성, 아무런 행동 없어” 
북 100번 한국 10번 갔단 사업가
“비즈니스, 정치적 접근 거둬야” 
한국 정부에 독자 제재 유예 제안

 

2014년 시작했던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TKR-TSR 연결의 시범사업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러시아산 석탄을 하산~나진 간 철도편으로 옮겨 나진항에서 한국으로 보내는 사업은 201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30만5000t의 석탄을 실어나르면서 남·북·러 합작의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됐다(안병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러시아는 3억달러를 들여 하산~나진 간 54㎞의 철로를 개·보수하고, 나진항 제3부두 항만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한·러가 합작하기로 했던 물류회사의 설립은 중단됐다. 안보리 제재는 러시아 외교부의 노력으로 예외를 인정받았다. 지난 3월8일자로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보낸 공식 답변서는 라선 콘트라스가 러시아산 석탄을 북한 나진항을 통해 제3국에 수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라선 콘트라스의 대북 합작사업을 예외로 인정했다. 180일 이내 북한을 기항한 제3국 선박의 국내 입항을 금지한 한국 정부의 독자제재만 남은 것이다.

 

하산역 앞에서 한 중년여인이 청소를 하고 있다. 이정표에는 왼쪽에 두만강(북한), 오른쪽에 모스크바라고 써 있다.

 

톤키흐 공동대표는 “지난해 안보리 제재에도 불구하고 라선 콘트라스는 28%의 마진율을 올렸다”면서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비즈니스임에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한국에 있는 것 같다”고 불만을 표했다. 북한을 100여차례, 한국을 10여차례 다녀갔다는 그는 한국 내 부정적인 여론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프레젠테이션을 열 번도 더 해봤지만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고 아쉬워했다. 

 

토론에 나선 올레그 키리야노프 모스크바 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 연구소 연구원은 더욱 직설적인 언어로 프로젝트 재개를 촉구했다. 그는 “라선 콘트라스가 하는 일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서 “통일에 대한 준비는 돼 있는지, 원하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나진은 지금 중국인 천지가 되고 있다”면서 “중국이 나선다면 한국 투자자들은 참여할 권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의 레닌 동상.

 

물론 불만만 표한 것은 아니다. 톤키흐 대표와 키리야노프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걸림돌인 한국 정부의 독자제재를 유예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북한이 핵·장거리 미사일을 다시 시험하거나 심각한 도발을 하면 곧바로 제재로 복귀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재를 중단하고 프로젝트를 재개하자는 말이다. 라선 콘트라스는 제재 예외를 인정받은 뒤 처음으로 다음달 하산~나진 루트로 러시아산 석탄을 베트남에 수출할 계획이다. 하산역 화물열차에 실린 석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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