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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김진호의 세계읽기]푸틴의 '한반도 행보'가 다시 주목되는 이유

by gino's 2017. 9. 2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월5일 중국 샤먼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받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풀을 뜯어먹더라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대북 제재의 비효율성을 강조했다. AP연합뉴스

■북핵위기 고조될수록 멀어지는 미국과 중국 발 외교적 해결 가능성

북핵 위기에서 러시아의 좌표는 무엇이며, 러시아에 북한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과연 말의 전쟁을 넘어 무력충돌로 치닫는 한반도에서 중재역할을 맡을 것인가. 북핵 위기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간의 ‘유치원 싸움’으로 번지면서 긴장이 높아졌다. 어제(9월24일)에는 ‘죽음의 백조’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 2대가 F-15C전투기 6대의 호위를 받으며 한국전쟁 정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동해공역을 넘어 무력시위를 했다. 한·미 연합사 차원의 훈련이 아니었다. 워싱턴의 펜타곤 대변인이 직접 나서 “21세기 들어 NLL(동해 북방한계선) 최북단을 날았다”고 밝혔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경고한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과 ‘사상 최고의 초강경대응조치 단행’으로 이를 되받은 2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성명전으로, 그렇지 않아도 미약했던 북·미 간의 직접적인 문제해결 능력은 사라진 끝이었다. 

김정일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대미 성명이 발표된 뒤 이틀후인 지난 9월23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북한 주민들이 반미시위에 참가해 김 위원장이 밝힌 ‘단호한 보복’을 결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정일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대미 성명이 발표된 뒤 이틀후인 지난 9월23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북한 주민들이 반미시위에 참가해 김 위원장이 밝힌 ‘단호한 보복’을 결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당분간 북·미 고위급 대화는커녕 접촉 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중국은 망연자실하게 손을 놓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오는 10월18일 당대회를 앞두고 국내문제에 코를 박고 있어 적극적인 중재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유가 있더라도 중국이 믿음직한 중재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권좌에 오른 뒤 북·중 관계는 장성택 처형 등의 악재를 거치면서 여전히 정상화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전례없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중국은 판을 바꿔놓을 준비가 안된 것은 물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정부 및 공산당은 북한 정부 및 북한 노동당을 상대로 제대로 말도 붙여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여기에 설령 김정은 정권이 몰락하더라도 북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중국의 전략적 한계도 상존한다. 갈수록 꼬여만 가는 북핵 위기의 중재자가 아쉬워지는 지금, 푸틴의 존재감이 새삼 부각되는 이유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경고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이틀 뒤인 지난 21일 국무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북한의 완전한 파괴’를 경고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이틀 뒤인 지난 21일 국무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무도 중재역 맡지 못하는 상황 속 주목되는 러시아의 개입

러시아가 북한 문제에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내보인 것은 올해 초여름부터다. 이고르 모르구로프 외교차관이 지난 6월27일 북한을 설득해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을 갖고 있다면서 중재의지를 공개했다. 공교롭게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중국이 (북한 설득에) 나섰지만 먹히지 않았다”는 절망 섞인 메시지를 내놓은 날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7월, 베이징에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발표한 뒤 그 연장선상에서 당사국 간 즉각적인 대화를 촉구해왔다. 트럼프의 유엔총회 연설이 있었던 9월19일 뉴욕에서 만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반복되는)사악한 사이클을 종식시키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관심은 러·중이 내놓은 공동제안의 내용이다. 중국이 제안했던 쌍중단(한·미 합훈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유예) 및 쌍궤병행(비핵화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 병행)에 순서(시퀀스)를 부여했다. 1단계는 쌍중단 그대로이지만 2단계로 평화협정 체결을, 3단계로 다자간 협의를 통한 지역안보체계의 확립 및 비핵화협상의 병행이다. 당장은 미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안이지만, 출발점일 뿐이다. 일단 대화채널이 가동되면서 얼마든지 서로의 요구를 투영해 조정할 수 있다. 이런걸 외교라고 하지 않던가.

얼핏 보면 비슷해보이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입장은 같을 수없다. 무엇보다 한반도 무력충돌을 비롯한 유사시(contingency) 단순히 국경지역의 혼란 끝에 국가의 명운이 흔들릴 수도 있는 중국에 비해 러시아는 다소 여유가 있다. 최악의 경우 핵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러시아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연루될 가능성 역시 적다. 여기에 사실상 중국과 달리 러시아는 김정은 취임 이후에도 북한과 돈독한 관계를 이어왔다. 북한 역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때마다 중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지만, 러시아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개입 이후 오히려 관계를 돈독히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에 비해 원유·식량 등 대북 지렛대가 훨씬 적지만, 정치적 대화의 조건은 나은 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br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푸틴의 글로벌 리더십 확인, 절호의 기회 

북핵 위기에 적극 개입할 국내외적인 동기도 충분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국제적 지위는 몇년째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및 크림반도 병합으로 2014년 2월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서도 배제됐다. 2015년 9월 시리아 내전 개입 역시 서방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러시아 국내적으론 푸틴 대통령의 국제적 활동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6월2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글로벌 이슈에 관한 한 87%가 푸틴을 지지했다. 러시아인들의 강대국(Super Power)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문제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로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푸틴이 여전히 안정적인 지지(58%)를 받고 있지만, 2015년 조사 때의 66%보다 떨어진 까닭이다. 

미국은 푸틴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러·중의 제안을 두고 “모욕적”이라면서 북한이 비핵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적 옵션 밖에 없다는 압박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여기에 작년 대선 당시 트럼프 선거캠프와 러시아 측과의 커넥션에 대해 특별검사의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개입이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해결의 여지를 스스로 좁히는 것은 바로 트럼프 본인이다. 경제적, 군사적 압박에 그치지 않고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발언에 이어 2500만 주민이 거주하는 북한의 ‘완전한 파괴’라는 말폭탄을 내놓음으로써 군사적 옵션 외에 다른 해법을 시도할 근거와 명분을 잃었다. 북·미가 서로 ‘유치원 싸움(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의 표현)’을 벌일수록 제3의 중재자의 역할이 커진다. 

전세계가 우려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푸틴이 ‘강 대 강’ 말의 전쟁에서 군사적 시위로 악화되는 북핵 위기의 한복판에 돌파구를 뚫어놓는다면 국제적 지위는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미국과 서방의 제재국면을 전환하려는 노력도 탄력을 받을 수있다. 푸틴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으면 이상할만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극동, 새로운 현실의 창조’를 주제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러시아는 대북 원유공급을 중단해달라는 문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다.  AP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극동, 새로운 현실의 창조’를 주제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러시아는 대북 원유공급을 중단해달라는 문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강조했다. AP연합뉴스

■17년 전 베이징~평양~오키나와 순방의 추억

푸틴은 미국과 중국, 일본, 한국을 포함해 북핵 위기를 가장 오래 다뤄온 유일한 국가지도자이기도 하다. 푸틴은 2000년 7월19일 베이징을 거쳐 평양을 방문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첫 방문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유예 용의’를 끌어냈다. 베이징에서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러·중 간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재확인한 뒤였다. 평양에서는 김 위원장과 만나 평화적 목적의 우주 발사체를 제공하는 것을 전제로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수있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푸틴 대통령은 21일 평양에서 곧바로 주요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오키나와로 날아갔다.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존재감을 강하게 남긴 순방이었다. 꼬박 17년이 됐다. 다시 푸틴의 한반도 행보가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51526001&code=970100#csidxe296cceeca5f1648a4ff917306ccb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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