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지난 9월6일 의회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미등록이주 청년들(Dreamers)에게 기회를 주자고 호소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의 이례적인 동맹이었다. 미국 하원 역사상 첫 여성의장을 지낸 펠로시는 민주당 내에서 캘리포니아 리버럴을 대표한다. AP연합뉴스
캘리포니아 리버럴의 대모와 백인 우월주의자를 두둔하는 포퓰리스트가 한 배를 탔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이 지난주 손을 잡았다. 펠로시뿐이 아니다. 뉴욕 출신의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트럼프가 나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얼핏 보면 트럼프 취임 8개월 만에 처음 구현된, 지극히 생소한 ‘협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거풀 들춰보면 포퓰리즘 정치의 단면일 뿐이다.
양측이 합의한 현안은 두가지다. 트럼프는 펠로시 원내대표와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제안한 연방정부 부채한도 3개월 연장안을 전격 수용했다. 허리케인 하비의 피해 주민을 지원하기 위한 3개월 한시 조치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는 또 지난 13일 펠로시와 슈머를 백악관 만찬에 초대한 자리에서 자신의 철폐방침을 번복하고 불법체류청년추방유예(DACA) 정책을 보류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악관 만찬에서 트럼프가 따뜻하게 민주당 지도부를 대한 이유의 하나는 자신이 생각과 달리 이들이 워싱턴 정치인 같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는 데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펠로시는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드리머들을 보호하려는 트럼프 대통령과 신뢰와 확신을 구축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내에서도 진보성향인 펠로시가 트럼프에게 호감을 표한 것 자체가 화제다. 슈머는 “트럼프가 우리(민주당 상원 의원)를 좋아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DACA는 불법체류자의 자녀로 미국 내에서 성장한 청년들에게 본국 추방을 2년간 유예하고 노동허가 취득 기회를 주는 조치이다. 관련 법안인 드림법(Dream Act)에 빗대 그 수혜 청년들을 ‘드리머(Dreamers)’라고 한다.
양측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다. 트럼프는 당장 공화당 내 ‘재정보수주의자(fiscal conservative)’들의 벽에 막혀 있던 연방정부 채무한도를 연장함으로써 하비 피해복구 비용을 마련하게 됐다. DACA의 대안 모색이라는 ‘어음’을 발행한 대가로 국경 경비강화 예산안 통과에 대한 민주당의 지지도 현금으로 챙겼다. 민주당 입장에선 12월 재연장 논의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드리머 보호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원하는 바다. 또 민주당이 비난해온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 건설예산은 제외했다. 트럼프가 민주당과 합의한 두가지는 모두 의회 공화당이 반대해온 것이다. 지난 6일 하원 표결에서 찬성 316 대 반대 90표로 통과된 연방정부 부채한도 연장법안의 경우 반대표는 전부 공화당에서 나왔다. 트럼프와 공화당 지도부는 지난 7월 오바마케어 폐지법안이 부결된 이후 긴장이 계속돼 왔다. 트럼프는 지난 13일 세제개혁과 관련해 “부자들이 얻는 이익은 전혀 없을 것”이라며 “백악관은 중산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강조, 공화당 지도부를 어리둥절케 했다.
트럼프의 변신을 두고 아무 철학도, 비전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현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트럼프가 옹호해온 반제도, 반기성 권력 가치관과 일치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의 모자를 썼지만 공화당 지도부 역시 본질적으로 타도 대상인 워싱턴 기성 권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폭력사태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두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 어젠다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비 피해복구자금은 트럼프 지지층의 핵심인 백인 저소득층을 정조준했다. 드리머들의 보호에 합의한 것은 민주당과의 타협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공화당을 흔드는 거래 전략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15일자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에게 도덕은 타협 가능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트럼프가 원칙으로 복귀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라며 “현재까지 그의 핵심 원칙은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쯤해서 정치인 트럼프의 실력을 되새겨봐야 한다. 트럼프는 여느 포퓰리스트가 아니다. 지난해 공화당 경선과정에서부터 엄혹한 과정을 거쳐 대권을 거머쥔,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성공한 포퓰리즘 정치인이다. 공화당과의 불화는 비록 오바마케어 폐지의 좌절을 계기로 표출됐지만, 트럼프는 태생적인 공화당원도 아니다. 지난해 대선 뒤 월스트리터저널·NBC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를 선택한 10명 가운데 4명은 그가 워싱턴의 정치문화를 뒤흔들 적임자라는 믿음에서 표를 던졌다고 답했다. 기성 정치권을 깨뜨리기를 바라는 민심을 숙주로 권력을 잡았다. 공화당의 전통적인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찍었다는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민주당을 지지해온 저소득층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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