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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60주년 평화로 가는 길]“NLL보다 DMZ 무장해제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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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문항 전 정전위 고문

 이문항 전 유엔군 군사정전위원회 특별고문(미국명 제임스 리·84)은 정전체제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60대 중반까지 세월의 대부분을 한국전쟁의 전장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보냈다.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비엔나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하고, 23일(현지시간) 직접 만나 추가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될 때까지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남북이 서로 긴 시간 대화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협력하면서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방한계선(NLL) 문제 역시 일방적 주장을 하기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중간선’을 찾는 방식으로 분쟁의 소지를 줄일 것을 당부했다.

▲ 한반도 평화 정착될 때까지 전쟁중단 상태 유지가 최선

- 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정전협정 덕분에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싶다. 언젠가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겠지만 그때까지 전쟁중단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겠는가. 이북은 최근 정전협정이 무효화됐다고 떠들지만 협정문을 보면 일방적으로 수정할 수 없다. 무효화나 폐기는커녕 조금 고치는 것도 상호 합의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서 전쟁은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다. 협정이 살아 있는데도 청와대 기습사건이나 울진·삼척 공비 침투사건 등 정규군이 들어온 적도 있지 않은가. 정전협정 자체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비무장지대(DMZ)만 해도 오히려 가장 중무장된 지역이 아닌가. NLL보다 DMZ의 무장해제가 더 큰 문제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이 제대로 됐어야 하는데 두고두고 아쉽다.”

- 한반도 평화 정착은 여전히 요원한 일인 것 같다.
“84년 동안 살아오면서 28년을 판문점에서 북한과 공개, 비공개 대화를 하면서 지냈다. (유엔사가 아닌) 남북한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대화를 해나가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협력하고 도우면서 가까이 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북한도 같은 민족으로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는데 먼저 양보하면 좋겠지만 그게 힘든 것 같다. 북한이 바뀌긴 바뀌어야 한다. 북한은 조선노동당 정치국이 다 움직이는 체제다. 나 역시 이북 사람들에게 종종 ‘제발 중국 좀 닮아라’고 말하곤 했다.”

- 2001년에 펴낸 저서 <JSA-판문점(1953~1994)>에서 NLL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최근 한국 내 NLL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하도 한국에서 NLL 문제가 많아서 이제는 뉴스를 접하고 싶지도 않다. NLL의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 (일각에서) 자꾸 ‘저놈은 이북을 지지한다’고들 하니까. 정전협상에서는 군사분계선만 합의했을 뿐 해상경계선은 없었다고만 말하겠다. 영해범위를 놓고 미국은 3마일을, 북한은 12마일을 각각 주장만 하다가 결국 ‘서로의 영토와 해면(海面)을 존중한다(정전협정 2조 14·15항)’고 막연하게 정리했다. 그 때문에 전후 정전위 회의석상에서는 단 한 번도 NLL이 거론된 적이 없다. 정전협정 당시만 해도 북한의 해·공군은 거의 미미한 존재다 보니 남쪽 어선들이 해주 쪽으로 자꾸 들어가니까 어로저지선으로 그어진 것이었다. 주한미군 해군사령부의 벽지도에 구리스 펜슬(색연필)로 그어져 있었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NLL에 대해선 아무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앞으로 바뀔지는 몰라도 국방부와 국무부는 공식적으로 ‘서해의 분쟁수역(disputed waters)’이라고 하지 다른 말은 쓰지 않는다.”

- 그렇다면 NLL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인가.
“이북에 무조건 NLL을 지키라고 해봐야 저쪽에서 지킬 리가 없다. 체제가 바뀌기 전에 그걸 지키겠는가. 저쪽 사람들은 정전협상 때부터 ‘서해 5개 도서는 당신들이 관리하게 됐지만 주변의 물은 한 방울도 소유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리 서로 주장만 해봐야 해결책은 없다. 결국은 우리가 주장했던 3마일과 저쪽이 주장했던 12마일의 중간선을 긋든지 공동어로구역을 만드는 방식으로 분쟁의 소지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본다. 내가 정전위에서 근무할 때 우리 측 간부들이나 회담 대표들도 남북이 협상을 통해 바다의 분계선을 정해야 한다고 우리끼리 말하곤 했다.”

- 어떤 계기로 정전위에서 근무하게 됐나.
“전쟁 때 피란지 부산에서 미 해병 5연대를 시작으로 해병대 정보본부·극동사령부 첩보 분야 등에서 일하면서 포항,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원산, 함흥 등 전장을 다녔다. 돌이켜보면 위험한 일도 많이 했다. 정전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국방부가 1966년 나를 판문점에 보낸 이유는 우리 측 협상대표를 미국 육·해·공군, 해병대 소장들이 교대로 하다보니 연계성도 없어지고, 정전협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전협상 전 과정과 제1회 정전위 회의부터 그때까지 모든 공개, 비공개 회의록을 떼어 봤다. 그때그때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조언하는 것이 임무였다. 미국에 돌아올 때까지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기습을 기도했던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상 1968년), 8·18 도끼만행사건 등 크고 작은 분쟁을 지켜보며 그 해결 과정에 참여했다.”

- 정전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이다. 헬기로 용산의 121미군병원에 실려온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를 봤는데 처참했다. 한국군 특전사 병사들이 투입돼 인민군 초소를 파괴하고 문제의 미류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끝냈다. 저쪽 비서장이 보자고 해서 가보니 김일성이 서명한 통지문을 건넸다. ‘이번 사건만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서로 노력해야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정전 이후 숱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북은 그때마다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한 것’이라면서 발뺌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김일성이 전쟁이 일어날까봐 무서워서 사과했다고는 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한 지미 카터의 당선을 바라는 마음에서 사과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개성공단 문제로 남북 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북한과 어떻게 대화해야 한다고 보는가.
“개성공단은 가능한 한 다시 열어야 한다. 개성공단 같은 것은 더 늘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북과 남이 서로 이익이 되도록 해야지 일방적으로 한쪽이 이득을 보는 건 안된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의 도움을 받게 하면서 생각하는 것도 바뀌도록 해야지, 인권이다 뭐다 떠들어봐야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말로만 협박하는 것도 그렇다. 그쪽 인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들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2002년 ‘고향방문단’으로 북한에 갔을 때 판문점의 옛 동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내가 정전위에 있을 때 대좌(남한의 대령급)였던 박림수(현 국방위원회 정책국 국장)가 평양 순안공항에 나왔다. 안내원이 ‘선생님은 다 아시는데 뭘 숨기겠습니까’라면서 평양이나 내 고향 개성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게 해줬다. 뒷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큰 거리의 사람들과 달랐다. 키도 작고 잘 못 먹어서인지 얼굴도 검었지만 인사만은 밝게 했다. 북한을 자꾸 비난만 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다.”  <김진호 선임기자·비엔나 | 손제민 특파원 jh@kyunghyang.com>

입력 : 2013-07-24 22:16:31수정 : 2013-07-24 22: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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