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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70년] 마오쩌둥 "한반도로 진군, 미군을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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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간 '지정학적 난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맞는 한국전쟁의 의미는 각별하다. 때마침 중진 언론인들의 '좋은기사연구모임'이 지난 16일 서울 인사동 정신영기금회관(관훈클럽)에서 연 '한국전쟁' 세미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되돌아볼 계기를 제공했다. 정승욱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국제관계학 박사)과 장정수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이 각각 '한국전쟁 발발 배경과 원인' 및 '한국전쟁의 현대사적 의미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제 내용을 토대로 한반도와 세계를 짚어본다.

중공군 포로들이 1952년 3월 20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포로송환 문제는 2년 넘게 이어진 정전협상의 최대 난제였다. 1952.3.20.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수집자료.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움직임은 더욱 교묘했다. 결정적인 순간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조정하는가 하면, 전쟁을 연장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군의 서울 점령 뒤 한강 도하 장비 지원을 사흘 동안 미룬 것이다. 프라우다 기자들로 위장시켜 전장에 파견했던 소련 군사고문단도 현장에서 철수시켰다. 당시 북한군 장교들이 우왕좌왕했다는 증언은 여러 번 나왔다.

북한군이 개전 초기 기선을 제압하자 마오쩌둥이 급해졌다. 7월 5일 스탈린에게 "유리할 때 승리를 결정지어야 한다"며 조기 파병을 제안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8월 28일에나 조기 참전에 반대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의도적인 지체였다.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면 미군과 싸워 중공의 힘을 뺄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기수가 됐다"면서 김일성을 치하하는 구두 메시지를 보냈다.

공산군 측에서 모든 전선을 완벽히 통제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서울 점령 뒤 사흘간의 공백과 북한군 정예 6사단(방호산 부대)의 부산이 아닌, 호남 방면 진격 지시 등 한국전쟁 주요 미스테리의 배경엔 스탈린이 있었다. 방호산 사단을 대전으로 투입해 7월 말 전쟁을 끝내겠다는 게 김일성의 전략이었으나, 스탈린이 방해했다. 방호산 사단은 마산에서 격파됐다. 김일성은 훗날 스탈린을 원망하면서 "혁명을 좌절시킨 늙은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이 결정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1989년 5월 23일 시위 군중이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가리고 있다. 톈안먼 사태 34주년을 맞아 AFP 통신이 전송한 자료사진이다. 2023.5.31. AFP 연합뉴스

마오 "참전 이익이 불참의 손실보다 크다"

마오는 장기전에 대비해 4개 병단, 11개 군단, 36개 사단으로 70만 명의 병력을 편성하는 한편 김일성에게 "유엔군이 인천이나 남포로 상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스탈린과 마오의 행보도 빨라졌다. 전쟁 기간을 늘리는 데 중공군이 긴요해졌다. 중공군의 조기 참전에 반대했던 스탈린은 이제 거꾸로 참전을 독려했다. 여기서 또 미국을 거론한다. "미국은 전쟁 준비가 안 됐고, 한반도는 미·일의 대륙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어야 한다."

10월 2~5일 중공당 정치국 회의에서 파병 반대의견이 많았지만, 마오는 "끌려들어갈 전쟁이라면 실리에 집중하자"면서 파병 쪽으로 기울었다. 중공당은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항미원조인민지원군을 편성하고 스탈린에게 공중 엄호를 요청한다. 석달 전 공중지원을 약속했던 스탈린은 10월 10일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10월 12일 김일성에 전문을 보내 "중국이 파병을 거부하면 만주로 철수해 빨치산 투쟁을 벌이라"고 지시했다.

언론인 정승욱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만주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한 지시와 관련, "스탈린은 "마오가 참전하지 않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으로 만주가 시끄러워지면 이를 빌미로 소련군을 다시 만주에 진출케 할 의도였다"면서 마오가 고심 끝에 출병을 결정한 것도 스탈린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둑판은 스탈린이 마련했지만, 마오가 자기 바둑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 중국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의 뒷면의 부조. 인천상륙작전이 아닌, 1944년 필리틴 레이테섬 탈환 작전 장면으로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잘못 기록된 것이 한 두 가지이겠는가. 2022.12.15. 연합뉴스

1951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중은 휴전으로 가닥을 잡았다. 7월 10일 판문점에서 첫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다시 스탈린의 정치가 작동했다. 그는 "(휴전은) 미국에 대한 굴복이다. 인내심을 갖고 반격의 때를 기다리자"며 전쟁을 독려했다. 한국전쟁은 교전보다 협상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서방은 '말로 하는 전쟁(A Talking War)'이라고 했고, 중국은 '싸우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싸우는((打打停停, 停停打打) 전쟁'이라고 했다. 그 와중에 유엔군과 중공군도 희생됐지만, 남과 북에서 수백 만 명의 한반도 거주민들이 산화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휴전 협상은 결국 전쟁을 기획했던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고 나서야 급진전했다.

스탈린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1994년 모스크바를 국빈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전달한 소련공산당 공식문서에는 한국전쟁을 "스탈린이 승인했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0월 13일 중공당 정치국 회의는 파병을 최종 결정한다. 펑더화이는 "(소련의) 공중 엄호가 없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마오는 "참전 이익이 불참의 손실보다 크다"라며 밀어붙였다. 공교롭게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한국전쟁의 속셈을 내보인 편지를 보낸 날이었다.

중공당에도 한반도는 치명적으로 중요했다. "대만과 베트남에서도 전쟁이 예상된다. 하지만 한반도가 (우리에겐) 지형적으로 가장 유리하다"라는 저우언라이의 1951년 4월 보고서가 이를 말해준다. 중공당의 논의과정에서 "명나라와 청나라 멸망의 단초는 모두 한반도의 불안정에서 기인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을 말한 것이다. 마오에게는 미국이 가장 위협이었다. 맥아더가 파악한 대로 중공군은 선봉대를 북한군으로 위장시킨 채 밤에만 이동하고 낮에는 은신했다. 소련의 공중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소련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한 셈이다.

요시프 스탈린의 생전 사진들이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의 스탈린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김진호에디터

10월 28일부터 1951년 1월 8일까지 중공군의 대공세가 벌어졌다. 맥아더는 되레 중국대륙을 만회할 지정학적 기회로 여겼다. 10월 13일 이승만에 보낸 편지에서 "중공은 장차 아시아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 될 것이다. 큰 군사력으로 성장할 중국을 쳐부술 기회는 지금이다. 다만 백악관의 반대가 변수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메르스(전쟁의 신)의 선물"이라면서 중공군의 전진을 지연한다는 목적으로 30개의 핵폭탄을 요구한 배경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 거주민이 겪을 재앙은 '부수적 피해'도 아니었다. 고려한 흔적조차 없다.

맥아더 해임, 끝없는 교착상태

맥아더는 11월 28일 미국 합참에 보낸 서한에서 참전 미군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원자폭탄 30여 발의 사용 권한을 주면 전세를 역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핵을 투하하면) 동해에서 서해까지 코발트 방사선이 막을 형성해 그 지역의 생명체는 60년 혹은 120년 후에야 다시 소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의 도박은 일단 소련이 미국과의 전면전 또는 3차대전의 의지가 적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최소한 만주를 장악, 레드 차이나의 아킬레스건을 끊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의 전략 구도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만주를 폭격하고, 미 해군이 중국이 중국 해안을 봉쇄하는 동시에 장제스 군대를 동원해 중국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구도였다.

만주폭격과 해안봉쇄, 국민당군 동원은 바로 맥아더가 같은해 12월 26일 워싱턴에서 트루먼에게 제시했던 3대 요구였다. 트루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2020년 9월 28일 중국 랴오닝성 성도인 셴양의 중국인민지원군 묘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운구하고 있다. 2023.6.14. 신화 연합뉴스

김일성은 38선을 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에 남하를 독촉했지만,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보급선이 길어지면 안된다. 수원 아래로는 내려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유엔군은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했고, 열흘 뒤 다시 38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중공군만 제한전을 한 게 아니었다. 트루먼 행정부도 확전 의사가 없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에 나진(2월 21일)과 압록강 연안의 중국 발전시설(3월 1일)에 대한 폭격을 각각 금지시켰다. 제한전을 명령한 것이다. 미국은 3월 19일 파병국들에게 38선을 약간 넘은 선에서 휴전할 의사를 전하고 동의를 구했다. 이를 전달받은 맥아더는 정면으로 반발했다. 의회 공화당을 움직여 행정부를 압박하는 한편, 3월 24일 미 합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위협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군이 중공 연안이나 내륙까지 전쟁을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 붕괴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트루먼은 결국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릿지웨이를 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국전쟁의 현재적 의미, 우크라이나 전쟁

스탈린과 마오, 맥아더의 차이는 지도 읽기에서 갈렸다. 마오와 맥아더는 벽에 걸어놓았을 평면 지도만 읽었지만, 스탈린은 지구본을 돌렸다. 동쪽을 요란하게 하면서 서쪽을 챙겼다. 전후 미국의 입김이 강했던 유럽에서 친소 동유럽블록을 공고히 한 것이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구본 돌리기와 같은 구조다.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의 역할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바이든이 벌이는 지정학적 게임을 연상시킨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소련군을 투입하지 않고 무기와 자금만 제공한 채 전략적 이해를 챙겼다. 바이든도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만 지원하면서 '전략적 횡재'를 누리고 있다. 스탈린이 중공의 힘을 빼놓으려고 했다면, 바이든은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힘을 최대한 빼놓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스탈린이 마오의 7월 초 파병 제안을 묵살한 것처럼 바이든 역시 작년 3월 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평화협상을 막았다. 

지난 5월 23일 관광객들이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 조각들을 둘러보고 있다.  2023.5.27. UPI 연합뉴스

바이든도 성동격서(聲東擊西)에 성공했다.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론을 확산시키며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중국의 군사력이 확대돼 온 것은 맞지만, 적어도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무관하다. 전쟁 뒤 영세중립국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31번째 회원국이 됐다. 조만간 스웨덴도 들어온다. 나토 회원국들은 경쟁적으로 국방예산을 늘리고 있고 바이든은 사상 최대의 국방예산을 확보했다. 강대국의 속내는 누가 이득을 보는지를 보면 드러난다. 바이든은 느닷없이 공급망의 안전을 강조하면서 동맹과 우방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유도, 제조업 강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1석 4조의 이득이다. 정전협상 70년이 한반도에 주는 함의다. 

언론인 정승욱은 스탈린의 1차적인 초점은 처음부터 한반도가 아니라 마오쩌둥의 중국이었다고 지적한다. "마오의 몰락을 노리고 기획한 전쟁"이라는 해석이다.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인 요소였다. 전쟁 막바지에 사망했지만, 스탈린의 전략은 적중했다. '애치슨 선언' 뒤 미·중의 접근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승욱은 토론에서 "이승만이 국제적 안목이 있었다지만, 스탈린이나 마오의 전략을 전혀 읽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어떤 흥정을 하는지 꿰뚫어 봐야 한다. 그래야 과거처럼 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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