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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당당한 싸이

칼럼/여적

by gino's 2012. 12. 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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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 논설위원



“이라크 포로를 고문한 XX들과 고문하라고 시킨 XX과 그 딸과 어머니, 며느리 등 코쟁이 모두 죽여/ 아주 천천히 죽여, 고통스럽게 죽여.” 미국 언론이 지난주 문제 삼은 싸이의 2004년 랩 가사 내용이다. 본인이 인정했듯이 랩 가사 내용은 참으로 부적절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를 때려부수는 퍼포먼스 동영상도 공개됐다. 싸이의 반미 퍼포먼스를 보고 랩 가사 내용을 알게 된 미국인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대중음악인이 대중의 집단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다. 다만 도가 지나치면 또 다른 분노를 자아낼 뿐이다. 싸이는 지난 9일 공식입장을 내놓고 랩가사는 무고한 이라크 주민의 희생에 분노한 반전시위의 일부로 해석해달라고 주문했다. 퍼포먼스는 효순·미선양 사건 당시 한국인들의 거국적 슬픔과 분노를 접하고 “그러한 슬픔을 표현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가수 싸이가 ‘크리스마스 인 워싱턴’ 공연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출처: 경향DB)


돌아보면 미친 것은 싸이의 표현방법뿐이 아니었다. 시절이 미쳤었다.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으로 지금까지 12만명 안팎의 민간인들이 숨졌다. 특히 2004년 김선일씨의 피랍·피살은 한국민에게 충격을 던졌다.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앳된 미군 여병사가 벌거벗은 이라크 테러용의자들을 학대·조롱하는 사진이 공개돼 세계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싸이가 ‘과도한 단어들로 인해 받은 상처’에 대해 진정어린 사과를 하면서도 당시의 정서를 부인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 분노는 정당했다.


 

어쨌든 모두 지난 일이다. 분노와 슬픔을 거칠게 표현했던 싸이가 세계인을 즐겁게 한 ‘강남스타일’을 부르고 있듯이 세월은 그리 지나갔다. 올해는 유독 막말 파문이 자주 발생했다. 과격한 말과 몸짓은 치유나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언젠가 또 다른 분노의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싸이만이 아닐 것이다. 


지난 9일 미국 워싱턴의 국립건축박물관 특설무대에 오른 싸이는 당당했다. 특유의 말춤과 함께 ‘오빤 강남스타일’을 신명나게 불렀다. 어린이 환자들을 돕기 위한 연례 자선공연 ‘워싱턴의 성탄절’에 초대된 자리였다. 꼬마 관객들을 감안해 ‘섹시 레이디’는 ‘산타 레이디’로, ‘강남스타일’은 ‘크리스마스 스타일’로 가사를 바꾼 것은 꽤 적절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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