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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백의종군

칼럼/여적

by gino's 2012. 11. 2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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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은 두 번의 백의종군을 당했다. 첫 번째는 1587년 10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다. 여진족이 함경도 경흥부의 녹둔도에 침입해 조선군 11명을 살해하자 조정은 둔전관이던 이순신의 책임을 물어 백의(白衣)를 입게 한다. 이순신은 이듬해 1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석 달 만에 사면, 복직된다. 임진왜란 중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1597년 4월1일부터 8월2일까지 백의종군을 한다. 이순신은 원균이 이끈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해 소임을 다한다. 


조선시대 백의나 포의(布衣)는 벼슬이 없는 사람을 뜻했다. 백의종군은 자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처벌 가운데 낮은 단계에 속했다. 무과 과거급제자의 신분은 유지시키되 어떠한 관직도 없이 군문에 종사케 하는 처분(순천향대 임원빈 이순신연구소장)이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 권율 장군의 군사고문 역할을 했다. 백의종군은 공을 세우면 원직복귀시킨다는 점에서 패자부활의 가능성을 열어둔 인사 시스템이었다. 죄와 벌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처분이 아니라 중간지대를 둠으로써 인재를 쉬이 버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담겨 있다. 


후보의 빈 책상 (출처; 경향DB)


백의종군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스스로 계급장을 떼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되(또는 내려놓음을 당하되) 맡은 소임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대동소이한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지난 주말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스스로 죄인을 자처했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늦어짐으로써 국민의 뜻에 부응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단이다. 하지만 ‘시대와 역사의 소명’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는 ‘돌아갈 다리’를 불사른 자의 단호한 의지가 묻어난다.


타의에 의해 백의를 입었지만 원균도, 권율도 못 이룬 대업을 이뤘기에 이순신의 종군은 광채를 발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되살아난 이순신은 노래한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라고. 백의종군을 자처한 안철수씨가 어떤 음조의 노래를 부르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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