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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사망…“어둠이 갔다” “장군 추모” 칠레의 두 마음

세계 읽기/인사이드 월드

by gino's 2012. 7. 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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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외무부 자료.


살아 다정했던 그들은 갈 때도 함께 갔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0일 91세로 타계했다. 지난달 16일 그가 생전에 자유시장주의를 구현했다는 이유로 인권탄압에 눈감았던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이 세상을 떴고, 피노체트의 재임 시절 산티아고의 대통령 관저에서 종종 담소를 나누면서 남미의 지정학적 틀을 자문했던 네오콘의 대모 진 커크 패트릭 전 유엔주재 미대사가 지난 7일 숨졌다. 20여일 만에 함께 이승을 떠났다.

칠레가 ‘더러운 연대기’를 닫은 이날은 공교롭게도 유엔국제인권의 날이었다. 백악관은 이날 성명을 내 “피노체트의 독재기간 칠레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면서 “오늘 우리의 생각은 독재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과 함께 한다. 칠레 국민들이 자유와 법치, 인권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기를 추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냉전시절 미국이 뒷배를 보아준 피노체트 집권 17년 동안 ‘자유’와 ‘법치’, ‘인권’은 칠레 국민들에겐 먼나라 이야기였다. 쿠데타를 밀어준 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공개된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문서에서 드러났다.

칠레의 비극도 ‘9·11’로 시작됐다. 1973년 이날 피노체트가 이끈 쿠데타군이 모네다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민주선거를 통해 처음 집권한 중남미 첫 좌파정권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측근을 투항시키고 홀로 남아 있다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70년 아옌데 대선 승리에 “무책임한 칠레 국민들로 인해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왜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CIA를 통해 수백만달러를 칠레군 장교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줬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환호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는 커크 패트릭이 피노체트와 함께 남미 지정학을 설계했다.

피노체트는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듬해 대통령이 된 그는 국회와 정당, 언론자유, 인신보호영장제도, 노동조합을 없앴다. 2만7천명이 고문과 옥살이를 했고, 3,200명이 피살되거나 실종됐으며 50만명이 망명 길을 떠났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재갈을 물린 피노체트는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경제 부흥에 전력했다. 세계 최초로 칠레에서 실험된 자유주의 경제모델은 이른바 ‘시카고 아이들(Chicago Boys)’로 불리던 시카고대학 경제학부 출신 관료들에 의해 추진됐다. 프리드먼은 칠레를 방문, ‘기적’이라고 치켜세웠다. 피노체트의 업적이라는 경제성장도 실상은 지표상의 성장일 뿐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다. 칠레의 자유주의 모델은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 등 신자유주의로 이어졌다.

피노체트는 90년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7년간 군총사령관으로, 면책권을 갖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을 오가면서 소일하던 그의 말년 설계가 어그러진 것은 98년 10월 스페인 법정이 인권탄압 혐의로 신병인도를 요구하면서부터다. 영국에서 1년반 동안 가택연금됐다. 잊지 않고 찾아준 이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였다.

2000년 3월 피노체트가 돌아오면서 칠레는 양분됐다. 광적인 지지자는 환호했고, 탄압의 희생자와 유족들은 300여건의 줄소송을 냈다. 칠레 대법원은 그의 정신 및 건강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 한번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인권단체들이 안타까워하는 이유다.

칠레는 피노체트의 죽음에 두개의 얼굴을 드러냈다. 어두운 역사의 마감을 축하하는 측과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장군’에 대한 추모가 엇갈렸다. 피노체트는 지난달 25일 망백(91세) 생일날 “집권시기 일어난 모든 일에 정치적 책임을 느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때는 칠레의 국익을 위해 최선이라고 믿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4년 미 상원 조사 결과 피노체트는 2천7백만달러(약 2백70억원)의 불법자금을 외국은행에 은닉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실’보다는 ‘화해’를 위해 군부독재의 과거사를 공식 종료한 한국과는 달리 칠레의 희생자 가족들이 벌여온 수많은 송사는 비록 피노체트를 단죄하지는 못했지만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판과정을 통해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상당부분 줄어드는 순기능을 했다는 게 칠레 민주인사들의 위안이다.

〈워싱턴|김진호특파원〉

기사입력 2006-12-12 08:27 | 최종수정 2006-12-1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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