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강도 압박에 처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대화 용의를 밝혔다. 지난 4일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과의 인터뷰에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의 뜨거운 무대를 끝내고 외교 트랙으로 갈 준비가 돼 있다"라면서 "협상 탁자에는 미국과 유럽, 우크라와 함께 러시아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화가 어떻게 시작할지, 어떻게 끝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푸틴과 대화할 것"이라며 우리는 이미 수많은 타협을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응은 싸늘했다.
'젤렌스키 없는 평화협상'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5일 "가급적 빨리 러시아와 평화를 논의하겠다는 말은 긍정적이지만, '푸틴과 대화 불가'를 명시한 젤렌스키 포고령 탓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9월 말 헤르손-하르키우-도네츠크-루한스크의 점령지를 러시아에 병합한 뒤 이러한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했었다. 1991년 영토 복원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러시아의 배상, 전쟁범죄 처벌 등을 담은 '젤렌스키 평화공식'과 무관치 않다.
러시아는 미국에 종전할 뜻을 밝히면서도 '젤렌스키 빠진 평화협상'을 거듭 시사하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은 4일 미국의 우크라 무기 지원 중단 결정과 젤렌스키가 미국과 회담에 복귀할 전망에 대한 브레미야 뉴스 기자의 질문에 "그 인간(젤렌스키) 머릿속을 들어가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를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문답 내용을 공식 누리집에 올려 놓았다.
미국은 지난달 28일 백악관 격론 뒤 잇달아 젤렌스키 대통령의 팔을 비틀고 있다. 3일 무기 지원을 중단한 데 이어 중앙정보국(CIA)의 군사정보 공유를 중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존 랫클리프 CIA 국장과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5일 각각 성명을 내고 우크라군과의 정보 공유가 중단됐음을 확인했다. 랫클리프 국장은 폭스뉴스 경제프로그램에 출연해 트럼프가 지난달 2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J.D. 밴스 부통령과 젤렌스키 간 백악관 격론 뒤 정보 공유 중단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 '잠정적인 조치'임을 강조했다. 무기 지원 중단과 마찬가지로 젤렌스키가 종전 협상에 참여하겠다는 선의의 믿음을 가질 때까지 중단하겠다는 것.
우크라엔 '채찍' 러시아엔 '당근'
랫클리프는 "군사적 전선과 정보 일선에서 중단 조치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면서 "우리는 침략을 밀어붙이기 위해 우크라와 어깨를 겯고 노력할 거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왈츠 보좌관도 이날 "우리는 한발 물러서서 모든 측면을 살펴보고 있다"라면서 정보 공유 중단을 확인했다. 그러나 (대화 재개를 희망한) 젤렌스키의 성명 발표 24시간 뒤 우크라 국가안보보좌관과 다음 협상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양국 안보보좌관 회담에서 돌파구가 열릴지는 미지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과 광물협정에 서명할 것임을 거듭 밝히고 있지만,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과 거리를 두고 있다. 광물협정은 어차피 서명만 앞둔 상태. 트럼프는 일단 호주머니에 들어 온 것은 더 이상 괘념하지 않고 목표에 집중한다. 다음 목표는 조속한 종전이며, 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이나 영토 보전 요구를 접으라는 압박이다.
젤렌스키는 트럼프가 4일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공개한 편지에서 "누구도 우크라이나 사람보다 평화를 원치 않을 것"이라면서 "나의 팀(정부)과 나는 '지속적인 평화'를 확보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언제든지 광물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도 다짐했다. "우리는 정말 미국이 우크라의 주권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평가한다"라며 사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지속적인 평화'라는 말을 통해 안전보장 요구를 담았지만, 트럼프의 관심이 아니다.
'눈' 없어진 우크라이나군
트럼프는 연설에서 "편지 보내와 고맙다"라며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곧이어 "우리는 러시아와 동시에 진행한 진지한 협상에서 그들이 평화에 준비가 돼 있다는 강한 신호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준비가 됐는데 우크라는 안 됐다는 점을 에둘러 말한 것.
CIA의 정보 공유 중단은 무기 지원 중단보다 우크라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지상, 공중, 해상전에서 '눈'이 없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2~3달간 사용할 무기와 포탄, 탄약을 확보한 상태이지만, 정보 공유가 중단되면 기존 무기조차 사용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공한 전술미사일(ATACMS)과 다연장로켓(HIMAS) 등이 공격 목표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된다. 우크라군이 선전해 온 흑해 해상 공격도 주춤할 수밖에 없다. 전쟁 초기 우크라군의 선전 역시 현장에 파견된 CIA 요원들이 러시아군의 위치 및 공격 지점에 대해 시시각각으로 보낸 정보 덕이었다.
'백악관 격론' 뒤 미국은 우크라군의 전쟁 수행에 잇달아 '채찍'을 휘두르는 데 반해 러시아에는 '당근'을 던지고 있다. 미군 사이버사령부의 대러시아 공격작전을 중단한 것. 왈츠는 2일 CNN 인터뷰에서 평화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에 주는 일종의 유인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기는커녕 9년 전 내가 말한 모든 것에 시비를 거는 옛 여자친구"에 비유했다.
이 대목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밀어붙이기 위해 우크라와 어깨를 겯고 노력할 것"이라는 랫클리프의 다짐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해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러시아의 역성을 드는 한편으로 러시아의 지정학적 입장이 강해지는 것은 막겠다는 심중을 내비친 것으로 읽힌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젤렌스키를 초청, 우크라 문제에 관한 특별정상회의를 연다. 각국에 우크라의 안보를 보장할 '의지의 연합' 동참을 촉구하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 정상에 미국에 제안하겠다는 우크라 평화안을 논의할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4일 회원국 중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속한 23개국이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1.5%씩 끌어올리자는 제안을 각국 정상에게 보냈다고 밝혔다. 4년간 6500억 유로(약 998조 원)를 조성, '미국 없는 유럽'의 안보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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