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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주도 '새로운 질서'에 허둥대는 우크라이나-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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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휴전을 한 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평화협상에 적합한 인물로 교체한다. 우크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이나, 1991년 영토 복원은 '비현실적'이다. 어차피 우크라전 종전은 러시아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 어떤 형식이건 전투가 멈추면, 러시아와 '매우 놀랍고 특별한 경제적 기회'를 본격 탐사한다. 종전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와의 광물협정을 체결, 5000억 달러의 지분을 확보하는 건 물론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앞줄 왼쪽부터)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등 각국 정상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2일 영국에서 우크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긴급 정상회의를 열었다. 나토 회원국인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가운데 줄 맨 왼쪽)도 보인다. 유럽 20여개 국 지도자들은 2일 런던 랑카스터 하우스에서 긴급회동 했다. 2025.3.2. [로이터 자료사진] 연합뉴스

미·러 우크라 '공동구상'

현재까지 드러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구상'이다. 지난 28일 젤렌스키 대통령과 백악관 집무실에서 격론을 벌였지만 트럼프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휴전-우크라 대선-종전-미·러 경제·안보 협력의 4단계 시나리오는 계속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젤렌스키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유럽 동맹국들의 반발과 우려는 익히 예상됐던 변수. '개가 짖어도 행렬은 지나간다'라는 트럼프의 속내가 엿보인다. 트럼프가 백악관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X계정 성명에서 젤렌스키의 외교적 결례에 크게 개의치 않음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일 것.

트럼프는 "오늘 백악관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만남을 가졌다"라면서 "내가 원하는 건 평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준비가 된다면 (백악관에) 돌아올 수 있다"고 적었다. 달리 말하면 미국이 제시하는 평화의 조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시 오지 말라는 말이다. 젤렌스키가 "소중한 백악관 집무실에서 미국을 무시했다"라면서도 "평화를 위한 준비가 된다면 돌아올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으로 젤렌스키가 미국의 구상에 걸림돌이 된다면 제거해도 된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다.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일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젤렌스키의 하야를 원하는가'라는 돌발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과 또 궁극적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신뢰구축 과정에 착수하는 한편 휴전에 동의할 수 있는 (우크라) 지도자가 필요하다"라면서 젤렌스키는 개인적, 정치적 동기에서 종전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적 동기'를 언급한 것은 젤렌스키가 전쟁을 명분으로 내린 계엄령 덕분에 작년 우크라 대선을 연기한 것을 상기시킨 것. 왈츠는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총선에서 패배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전쟁 시기에 필요한 사람(man for the moment)이었던 것처럼 젤렌스키가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백악관을 황급히 떠나고 있다. 2025.2.28. EPA 연합뉴스

'젤렌스키 교체'는 푸틴의 아이디어

젤렌스키에 대한 거부감은 트럼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생각을 거울처럼 되비친 것. 푸틴은 발레리 잘루지니 전 우크라군 총사령관이 우크라 여론조사에서 젤렌스키에 크게 앞서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잘루지니는 (젤렌스키처럼) 정치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해 왔다. 잘루지니는 지난해 총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기 전 우크라 전쟁은 이미 러시아의 승리로 기울었다고 인정했었다.  전쟁 중 대선을 치룬 푸틴과 달리 게엄령을 빌미로 대선을 미룬 젤렌스키의 정체성을 문제 삼아온 것도 푸틴이었다. 트럼프는 지난 달 19일 X 계정에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젤렌스키는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니면 나라를 잃게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트럼프의 우크라 구상은 기실 트럼프-푸틴의 공동구상이다. 시나리오 초안이 완성된 지점은 지난달 12일 푸틴 대통령과 가진 90분 동안의 통화. 트럼프와 푸틴은 이후 우크라 문제에 관한 언어를 맞추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의 종전'이라는 푸틴의 요구를 수용했고,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유세 모토였던 '상식(common sens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 24일 전쟁 3주년에 맞아 유럽연합(EU)-우크라가 유엔 안보리에 상정한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안에 제동을 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 대신 '분쟁(conflict)'으로 고칠 것을 역제안했다. '전쟁'이 아니라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러시아의 공식 입장을 두둔한 것. '평화'와 '평화적 해결' 역시 푸틴과 트럼프가 공용하는 말이자, 트럼프가 젤렌스키와의 백악관 격론에서도 일관되게 사용한 말이다. 문제는 '평화'의 내용이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트럼프-푸틴의 통화가 있었던 12일 브뤼셀의 나토 본부 연설에서 유럽 회원국들의 '안보 주인의식(security ownership)'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의 영토 복원 및 나토 가입은 "비현실적"이라고 단언했다. 미군의 우크라 평화유지군 불참 방침도 확인했다. 젤렌스키 정부가 안전 보장 문제를 되풀이 강조하는 까닭이다. 왈츠는 CNN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에 "미국이 우크라에 어떤 지원을 할지는 앞으로 논의할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안전보장의 상세 내용을 먼저 이야기하는 건 마차를 말 앞에 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젤렌스키가) 물건을 살지 안 살지 결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장을 먼저 이야기할 거냐"고 반문했다. 다만, 우크라 안전 보장은 유럽 군대가 맡아야 할 일임을 분명히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2일 통화를 하고 우크라전 종전 협상에 즉각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사진은 2018년 7월 16일 핀란스 헬싱키에서 이뤄진 미러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유럽 '의지의 연합' 다짐하지만...

미국의 비대한 국방예산과 미군에 의해 유지돼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붕괴 조짐은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을 뒤흔들고 있다. 탈냉전 이후 미국은 나토 예산의 3분의 2 정도를 충당해 왔다. 미·러가 한배를 타겠다는 입장을 내보이면서 유럽 정상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지난 주 잇따라 워싱턴을 방문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입장을 확인했을 뿐이다. 미-우크라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2일 런던에서 20여 개국 정상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2월 10일 파리 정상회의 이후 두 번째다.

주최자인 스타머 총리는 우크라 평화를 위해 △계속적인 군사 지원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력 △우크라의 주권과 안보를 확약하는 지속적인 평화 △ 평화협상에 우크라 참석 △종전 뒤 미래 침공을 격퇴할 방어능력 제공 약속 등을 골자로 한 '의지의 연합'을 제안했다. 평화유지군 파견 문제는 평화협상 또는 종전협상이 마무리된 뒤 검토키로 했다.

스타머는 BBC에 "영국은 프랑스와 1~2개 다른 나라와 함께 싸움을 멈출 계획에 관해 우크라와 협력할 것이며 그 후에 미국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타머가 말한 '싸움을 멈출 계획'은 휴전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은 르 피가로 인터뷰에서 "지상전을 제외하더라도 일단 하늘과 바다에서 한 달간 전투를 중지하자"고 제안했다. 마크롱은 또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2%인 나토 회원국의 국방예산 증액 목표를 3~3.5%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년 6월 현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32개 회원국의 총 국방예산. 3분의 2에 달하는 짙은 청색이  미국 예산이고 연한 청색이 나머지 31개국의 예산 총액이다. 2023, 2024년은 예상치. [나토 보도자료] 시민언론 민들레

전략적 자율성? 10년째 제자리걸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유럽의 모든 행보는 정확히 트럼프의 손바닥 안에 있다. 우크라 휴전과 유럽의 국방예산 증액은 모두 트럼프 행정부가 주문하는 '안보의 주인의식'에 따른 것. 전쟁 발발 3년이 되도록 휴전이나 종전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 유럽이 갑자기 트럼프 가이드라인에 따르는 모양새다.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나토의 유럽 회원국은 30개국. 뉴욕타임스는 이 중 '의지의 연합'에 적극 가담할 나라는 현재까지 영국과 프랑스 외에 네덜란드와 북유럽 일부 국가 정도가 꼽힐 뿐이라고 분석했다.

젤렌스키는 런던 정상회의 뒤 "우리는 모두 진정한 평화와 보장된 안보를 위해 미국과 협력 토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크라도, 유럽도 트럼프-푸틴이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허둥대는 모습이다. 유럽연합(EU)이 국방·기술·경제정책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겠다면서 '전략적 자율성'을 공표한 2016년부터 따지면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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