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가치(Les valeurs républicanes)'가 주로 좌파의 희생 덕에 살아남았다. 프랑스 좌파 정당연합 신인민전선(NFP)이 제1당이 됐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연합이 2위로 올라섰다. 1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1위였던 극우 국민연합(RN)이 3위 정당으로 내려앉았다.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헝(Hung) 의회'가 됨에 따라 정부 구성과정에서 다소 굴곡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8일 프랑스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NFP 182석, 앙상블 168석, RN 143석, 우파 '공화주의자들(LR)' 45석, 독립 우파 15석, 독립 좌파 13석, 독립 중도 6석을 각각 얻었다. 7일 프랑스 총선 결선투표 결과다.
좌파의 희생, 중도의 기회주의, 우파의 배신
크게 버린 신인민전선(NFP)이 크게 얻었다. 실리는 중도와 우파가 챙겼지만, 공화주의 가치라는 명분을 지키면서도 국민의회(하원) 제1당이 됐기 때문이다. 녹색당과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사회당, 공산당 등 범좌파를 묶어 정당 연합을 이뤄낸 극좌 포퓰리즘 '불굴의 프랑스(LFI)'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선투표에 진출한 후보 중 224명이 사퇴했다. NFP 134명, 앙상블 82명으로 좌파후보의 사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RN 후보가 있는 3자 대결 선거구에서 일괄사퇴함으로써 '비 RN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사퇴 대상은 지난달 30일 1차 투표 결과 각 선거구에서 3위를 기록했던 NFP 후보들이었다. 르몽드는 투표 48시간 전 "반극우"를 표방하며 결행한 후보 224명의 사퇴가 이번 총선의 성격을 바꿨다고 평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중도 연합 앙상블의 대오는 다소 모호했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후보 사퇴 기준을 "공화국의 가치를 선택한 후보를 돕거나, 극우의 승리 위험이 있는 경우"로 한정함으로써 선거구마다 사퇴 기준을 둘러싼 혼선을 야기했다. 좌파는 모호성을 거부했다.
장뤼크 멜랑숑(72) LFI 대표는 7일 밤 프랑스2 TV에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극우의 집권에) 끔직한 위협을 느꼈지만, 이제 안심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탈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대통령은 NFP에 정부를 맡겨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교사 출신인 멜랑숑은 리오넬 조스팽 동거정부에서 직업교육부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사회당원. 사회당의 우경화에 출당, 2008년 좌파당을 공동창당한 뒤 2016년 극좌 포퓰리즘 정당 '불굴의 프랑스(LFI)'를 창당했다. 201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11.1%를 얻었지만 2017, 2022 대선 1차 투표에선 잇달아 3위를 기록하면서 주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멜랑숑, 마크롱에 '정부 이양' 촉구
사회당 대통령(2012~2017) 출신으로 이번 총선에 당선된 프랑수아 올랑드는 "비록 사퇴 후보 대부분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지만, 좌파의 선명성으로 공화주의 전선이 되살아났다"라고 강조했다. 중도는 좌파 희생의 최대 수혜자였다. 1차 투표에서 전체 577개 선거구 중 70곳에서만 1위를 차지했던 앙상블이 두 배가 넘는 168석을 횡재했다.
마크롱의 중도 연합이 정부 구성과정에서 좌파의 희생을 얼마나 고려할지 미지수이지만, 유권자들이 좌파 정신의 부양을 목격한 건 분명하다. "극우를 막은 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는 올랑드의 말이 울림을 갖는 이유다. 1차 투표 1위 선거구가 159곳이었던 NFP는 182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만큼 중도와 우파 후보의 사퇴가 적었다는 방증이다. '반극우'의 명분보다 실리에 따라 RN과 연합한 우파 공화주의자들(LR) 역시 1차 투표 1위 선거구(20개)의 두 배가 넘는 45석을 챙겼다.
'공화주의 가치' 연대의 최대 피해자는 사상 첫 집권이 예상됐던 극우 포퓰리즘 정당 RN이다. 1차 투표 결과 577개 선거구 중 297곳에서 1위를 차지해 기염을 토했던 RN은 결선투표 결과 143석을 얻는 데 그쳤다. 좌파를 중심으로 우파 일부가 가세한 '반극우 방화벽'에 또다시 부딪혔다. 단선 투표 종다수((the first-past-the-post)로 당선자를 가리는 영국이었다면, 1차 투표 결과로 과반(189석) 의석 획득이 충분했지만, 눈앞에서 집권을 놓쳤기 때문이다. RN의 1차 투표 득표율(34.2%)보다 적은 33.8%를 얻은 영국 노동당은 전체 650석 중 과반이 넘는 412석을 얻어 보수당(121석)과 자민당(72석)을 멀찌감치 제쳤다. 선거제도에 따라 영국 노동당은 과반이 넘는 제1당이 됐고, RN은 원내 3위 정당에 그친 것이다.
눈앞서 승리 놓친 극우, 영국 노동당보다 높은 득표율
그러나 RN의 부상이 주는 함의는 작지 않다. 2017년 총선 7석, 2022년 총선 89석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143석을 얻은 것은 극우의 진출을 공동으로 저지한 프랑스 좌, 우파 정당의 '공화주의 가치'가 갈수록 엷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1차 투표 뒤 정권교체를 확신했던 RN의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 전 대표는 "마크롱과 극좌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이 아니었다면 RN이 절대 과반이었을 거다. 조수(물결)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사흘 간격으로 치러진 영국 총선(4일)과 프랑스 총선 결선투표는 양국 정치문화의 차이를 새삼 드러냈다. 영국 노동당이 반이민, 영국인 최우선 고용이라는 보수당의 명제를 빌려 승리했다면, 프랑스 좌파와 중도는 어쨌든 차별과 배제의 정치를 상대적으로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멜랑숑의 LFI가 전체 유권자의 10% 안팎에 달하는 무슬림 유권자 4명 중 3명의 표를 휩쓴 이유다. 영국 노동당과 마크롱의 르네상스가 우크라이나의 영토 완정과 가자지구 사태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해 왔다면, 멜랑숑의 LFI는 우크라 전쟁을 반대하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에 적극적인 반이스라엘 행보를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르펜은 우크라 전쟁에서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멜랑숑이 '이슬람 공포증'을 걱정하는 무슬림들의 표를 얻었다면, 르펜은 반유대주의 흐름에 긴장하는 유대인들의 표를 주운 셈이다.
'불굴의 프랑스(LFI)'에 쏠리는 눈
프랑스 언론이 LFI에 '극좌', RN에 '극우' 딱지를 붙이는 이유는 유럽연합(EU)과 세계화, 자유무역, 기성 엘리트 계급으로 대표되는 '제도'를 부인하거나, 제도 밖에서 대안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RN은 유로화를 인정하고, 인종주의를 일부 탈색하는 등 카멜레온과 같은 변신을 해 왔지만, 반이민, 반이슬람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극' 성이 더 강하다. LFI는 프랑스 서민의 삶을 파괴한 유럽통합과 세계화에 반대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3대 정신의 하나인 형제애 기반에서 이민자와 무슬림을 포용한다. 마크롱에게 남은 선택지는 신인민전선에 정부 구성 권한을 주거나, 각료의 상당수로 끌어들여 혼합정부를 구성하는 것뿐이다. 어떤 경우건 왼쪽으로 이동해야 할 처지다.
☞ '톨레랑스의 프랑스'가 어쩌다가... 극우 국민연합(RN) 총선 1차 투표 압승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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