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엑스포 징비록] 사우디의 결코 축하받지 못할 성공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12. 3. 13:27

본문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비전 2030'에 금상첨화가 됐다." 11월 28일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에서 사우디 리야드가 부산을 119 대 29표로 압도하고 2030 세계 엑스포 개최권을 따낸 뒤 로이터 통신의 평가다. 빈 살만 왕세자가 '원유 이후' 사우디의 국가적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비전 2030'에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평가했다. 동아시아 분단국의 '1호 영업사원'은 부산 갈매기의 날개가 꺾였지만, 사우디에 축하인사를 보내고 개최 준비를 돕겠다고 지난 29일 대국민담화에서 약속했다. 그런데 사우디의 승리는 세계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6월 20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을 한 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2030 부산엑스포 유치에 대한 프랑스의 지지를 당부하고 마크롱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다. 두 정상은 11월 24일에도 회동했다. 2023.6.20. 대통령실 누리집

'빈 살만의 푸들'로 등극한 마크롱

사우디는 '전체주의 이전의 전체주의' 국가다. 정치적으론 봉건 왕정을 유지하고 있고, 경제적으론 수천 명의 왕족이 곳곳의 이권에 빨대를 꽂고 있는 '왕족 독점 자본주의'의 체제다. '1호 영업사원'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법치주의와는 무관한 국가다. 사우디의 승리는 이른바 '가치 외교'가 공허한 독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계가 다시 한번 왕국의 권력과 돈에 휘둘리면서, 사우디는 인권 문제로 자국을 고립시키려던 국제사회의 노력을 극복했다"고 뉴욕타임스가 평가한 까닭이다. 리야드가 확정된 순간 환호한 사람 중에는 사우디를 공개 지지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있었다.

사우디는 엑스포 유치 덕에 국가 이미지를 환골탈태할 기회를 얻었다. 원유 외에 세계에 내놓을 게 거의 없던 사막의 벽지였던 봉건 왕국이 글로벌 비즈니스와 관광의 메카로 떠오르게 됐다. 2029 동계 아시안 게임과 2034 월드컵도 유치했다. 포르투갈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2억 달러를 건네고 국내 리그에서 뛰게 한 이유가 있다. 프로골프 PGA 대회도 유치한다. 빈 살만은 어둠 속의 절대군주에서 번듯한 글로벌 지도자로 등장했다. 호날두는 28일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에 등장해 "나와 가족은 이곳, 사우디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는 리야드 엑스포에 78억 달러를 투입할 것이라고 파리 시내 광고판에 선전했다. 

그러나 이 모든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봉건 왕국을 "진보와 지속가능성의 빛(beacon)이자, 전례 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젊고, 활기찬 국가"라는 프리젠테이션 내용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실질적인 통치자인 빈 살만 시대에 사우디가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는 등 봉건적인 제약을 다소 푼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폭압을 계속했다. 2018년 10월 2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쇼기를 잔인하게 살해,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28일 파리 엘리제궁 앞에서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맞고 있다. 마크롱은 빈 살만이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4년 뒤 외교활동을 재개하던 무렵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2030 세계 엑스포 투표에서도 공개적으로 사우디를 지지했다. 2022.7.28. AP 연합뉴스

카쇼기는 사우디의 예멘 내전 개입과 빈 살만의 폭정에 저항하던 언론인이었다. 그의 살해는 201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어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남 김정남 살해와 함께 국가가 자행한 대표적인 살인극으로 지목됐다. 사우디는 2016년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기도 했다.

언론인 살해국이 진보의 빛?

지탄받던 사우디와 빈 살만의 부상은 공교롭게 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려 진행된 국제사회의 '탈선'과 관련이 깊다. 이른바 '규범 기반 국제질서'와 민주주의 가치가 쓰레기통에 던져진 가운데 이룬, 때 묻은 성공이었다. 사우디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고 했던 지도자는 바로 입버릇처럼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사우디와 러시아와 유가 인상 담합을 깨기 위해 리야드를 방문, 빈 살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러시아 군의 민간인 공격을 통렬하게 꾸짖던 바이든과 마크롱은 '빈 살만의 푸들'을 자처했다. 그리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인 도륙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온갖 고상한 가치를 주워섬기는, 이른바 국제사회의 지도자들이다.

세계 15개 인권 단체는 BIE 총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기본권 탄압과 억압의 내력을 들어 사우디를 지지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2030 세계 엑스포에서 17표를 얻어 부산과 함께 탈락한 이탈리아 로마의 로베르토 구알티에리 시장이 "매우 실망했다"고 말한 이유는 유치전에서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구알티에리 시장은 투표 전 "사우디가 승리한다면, 음울하고, 억압적이며, 어두운 엑스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2018년 11월 16일 사우디아라비아 요원들이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한 언론인 자말 카쇼기 추도 기도회에서 한 참석자가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와 카쇼기가 담긴 포스터를 보이고 있다. 빈 살만 사진에는 '암살자'라고, 카쇼기 사진에는 '순교자'라고 적혀 있다. AP자료사진 연합뉴스

그나마 파리 출장비 아낀 멜로니 

투표장에 오지도 않은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아예 침묵했다. 로마의 BIE 마지막 프리젠테이션 주제는 인권과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멜로니 내각 역시 고상한 가치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 정부는 아니다.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에 편승해 집권한 극우 포퓰리즘 정권이기 때문이다.

빈 살만의 2030 엑스포 유치는 모순과 자가당착의 국제질서에서 태어난 결과물이다. 돈만 거래된 게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사태에서 비롯된 정치도 투영됐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의 가자지구 사태 비난에 이탈리아를 공개 지지했다. 당초 2030 엑스포 유치 희망국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포함됐었다. 러시아 BIE 대표단은 28일 파리에서 일부 회원국들의 정치적 편견을 이유로 2025 오사카 세계 박람회 불참을 선언했다. 엑스포의 창으로 내다본 풍경은 국내건, 국외건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이탈리아도 결과에 승복하긴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처럼 사우디의 승리를 축하하며 지원을 다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장사꾼이 이념을 운운하는 건 '상도'에 맞지 않는다. 해서, 영업은 기업인에게 맡길 일이다. 그래도 '세일즈'를 하겠다면, 가치나 이념을 입에 담지 말 일이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지난 6월 20일 파리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멜로니 총리는 그러나 2030 세계 엑스포 투표가 열린 11월 28일 BIE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2023.6.20. AP 연합뉴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