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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하미학살 55주년, 덩그러니 남은 '팜티호아의 목발'

by gino's 2023. 5. 18.

시민사회네트워크,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 착수 촉구

1968년 2월 24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 마을. 마흔 살의 팜티호아는 느닷없이 날아온 한국군의 수류탄에 두 발목을 잃었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짜리 아들을 잃었다.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집에 살던 사촌 올케와 배 속의 태아, 젖먹이 아기,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도 총질에 스러졌다. 사촌 올케는 죽임을 당하기 전 강간을 당했다. 큰아들 응우옌럽은 마을을 떠나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천우신조였다. 하지만 종전 1년 뒤 큰아들마저 농사일을 하던 중 불발탄이 폭발해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공교롭게 한국군이 주둔했던 땅이었다. 남편은 이미 불귀의 객이 돼 있었다. 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타계 1년 전인 2012년 팜티호아의 모습. 이재갑 작가

하미 마을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다낭, 호이안과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팜티호아는 전쟁 시기 방공호에서 2년을 살았다. 다음 3년은 호이안에서 구걸로 연명했다. 아들마저 장애인이 되자 남의 집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살았다. 팜티호아가 이후 살아낸 세월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1998년 3월 5일 다낭에 입항한 일본 '피스보트'에는 한국인 20명이 있었다. 팜티호아는 마을로 찾아온 그들과 처음 대면했다. 이후 하미 마을을 찾아온 한국 친구들에게 참상을 덤덤하게 증언했다. 한국군은 은폐를 하려고 했는지 학살 다음 날 다시 마을에 들이닥쳐 불도저까지 동원해 시신을 훼손했다. 그러나 미움도, 증오도 엷어졌다. 고개를 숙이는 '한국 친구들'의 무거운 마음을 되레 달래주었다. 언제부터인지 평온한 얼굴에 부처의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의 원한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 거야. 그러니 한국 친구들이 찾아오거든 잘 대해줘." 2013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직전, 팜티호아가 남긴 유언이다. 한베평화재단이 채록한 증언과 기록을 갈무리한 내용이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17일 서울 퇴계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팜티호아의 목발을 공개하고 있다. 이정란 한베평화재단 활동가(가운데)와 하일호 연출가(왼쪽), 임재성 변호사가 목발을 들고 있다. 탐티호아의 사진을 들고 있는 이는 최정현진 활동가이다. 목발은 지난 2월 학살 55주년을 맞아 하미 마을에서 열린 추도 행사에 참석한 한국인 활동가들에게 아들 응우옌럽이 "한국군에 대한 원한은 없지만, 한국 친구들이 어머니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전달한 유품이다.   김은석 작가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1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의 하미학살 진상규명 결정을 촉구하며 연 기자회견장에 팜티호아의 유품이 소개됐다. 생전에 사용하던 목발이다. 낡은 목발은 하미학살의 진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견뎌온 고통의 세월을 증언했다. 증오와 용서,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기자회견은 진화위가 1년 넘게 결정을 미루고 있는 하미학살 진상규명 작업 착수 여부를 논의하는 24일 회의를 앞두고 진화위의 정의로운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은 회견에서 "피해자들이 스스로 원한의 마음을 정리하고, 용서의 마음까지 품었지만, 한국 정부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서 "베트남 피해자들이 55년 동안 감내해온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팜티호아의 목발을 공개한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가 17일 서울 퇴계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앞에서 하미학살 진상규명 작업에 착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은석 작가

응우옌 티탄(66)을 비롯한 베트남 하미학살 사건 피해자 유가족 5명이 진화위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것은 지난해 4월 25일이었다. 확인된 희생자만 135명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사건이 알려진 것은 1990년대이지만, 피해 유가족들의 진실 규명 신청은 처음이다. 유가족들은 국가의 공식 사과와 배상·보상 및 추모사업 지원 등 피해회복 조치, 베트남전쟁 역사 기록에 하미학살 내용 추가,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 4가지를 요구했다.

진화위의 처리 절차에 따르면 신청 90일 이내 조사 개시 또는 각하 결정을 내리게 돼 있건만, 신청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응우옌티탄은 지난 10일 진화위에 편지를 보내 "조사 개시를 하건, 거부하건 답변을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모든 것을 말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지만, 얻을 수 있었던 건 기나긴 침묵뿐"이었기 때문이다. 진화위에 전한 그의 요구는 당장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조사할 용기'라도 내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나서 하미 학살의 진실 규명을 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전쟁범죄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미학살보다 피해 규모(희생자 70여 명)가 작았던 퐁니-퐁녓 마을 학살사건은 지난 2월 7일 법원이 먼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박진수 부장판사) 재판부는 사상 처음으로 '피고 대한민국'의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

작고 1년 전인 2012년 팜티호아의 모습. 이재갑 작가

그러나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열흘 뒤 국회에 출석해 "(베트남전 당시)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며 전면 부인했다. 국방부는 결국 3월 9일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볼 필요성이 있다"면서 항소를 제기했다. 베트남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수교 30주년을 맞아 방한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과 합의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기반해 한국이 역사의 진실을 엄숙하게 인식, 존중하기를 제의한다"고 밝혔다.

하미학살 사건은 미군의 공식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 등 입증자료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렇기에 진실 규명 작업이 더 절실하다. 다행히 진화위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조사기관이다. 새로 구성된 진화위가 오는 24일 내릴 결정은 한국과 베트남 현대사에 또 다른 획을 긋게 될 것이다.

진화위원은 김광동 위원장 이하 이옥남 전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이상훈 전 금융경제연구소 소장, 오동석 아주대 교수, 장영수 고려대 교수, 이상희 변호사, 차기환 변호사 등 7인이다.

진상규명을 신청한 응우옌티탄(오른쪽)이 2018년 4월 시민평화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시민평화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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