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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즈음, 한인 디아스포라를 생각한다

한반도, 오늘

by gino's 2021. 9. 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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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20년 전 가을날 저녁이었다. 멀리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찾아온 기자를 맞이한 김씨 집안 사람들의 얼굴에선 도무지 ‘한국’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가의 조명이 밝지 않아서인지 살갑게 손 내미는 얼굴들이 더 흐릿하게 보였다. 백인의 얼굴도 있었고, 가무잡잡한 피부도 보였다. 한국인은커녕 황인종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비포장 외길과 녹슨 철로로 간신히 세상과 연결된 쿠바 동북단의 마나티항. 아바나에서 700㎞를 달려가 한인 후손 에스민다의 가족을 만난 자리였다. 그들의 입에서 엄마의 음식 이름이 나온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김치, 지지미, 콩장, 부침개….” 그 순간, 조금 더 넓은 개념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단일민족’ 중년남의 뇌리에 어렴풋하게 찾아들었다.

못난 왕과 탐욕스러운 고관대작들이 그야말로 쥐새끼처럼 나라를 갉아먹던 구한말, 고향을 등지고 이역만리로 떠났던 한인들은 많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간도가 첫 귀착점이었고, 한 번 떠난 길은 제2, 제3의 고달픈 여정으로 이어졌다. 연해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로 옮겨졌고, 사할린으로, 하와이로 흩어졌다. 1033명이 멕시코로, 거기서 288명이 다시 쿠바로 흘러들어갔다. 경향신문이 광복절 특집으로 그들을 찾아 나섰고, ‘역사 속의 마지막 한인’ 특집 중 쿠바 부분을 맡은 것은 축복이었다. 지금까지 온·오프라인에서 그들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쿠바 한인 후손 에스민다 아마도 김 가족의 2001년 모습이다. 에스민다와 딸 렉시스, 아들 젠드리가 마나티의 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에스민다는 7순을 바라보는 나이(68세)가 됐고, 렉시스와 젠드리도 이제 중년이다. 당시 국립 예술학교에 재학중이던 렉시스는 졸업 뒤 뮤지컬 가수로 성공해 국내외 공연을 다녔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200여명의 한인들이 그다지 넓지 않은 섬나라에서 겪은 100년 동안의 오디세이를 되짚어 보면, 한국과 쿠바 현대사의 굵직한 굴곡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750만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들의 역사를 톺아볼 수 있는 표본집단이자 창(窓)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한날한시에 낯선 땅에 도착한 극소수의 한인들이 살아온 궤적을 통해 그 시절 떠난 재외동포들이 겪었을 디아스포라의 삶을 깊숙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00년이 된 쿠바 한인 이민사는 바로 그 점에서 각별하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소설 <검은 꽃>으로 엮어낸 작가는 김영하다. 작가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2004년 알라딘 인터뷰에 나온 그의 말을 빌리자면, 검은 꽃의 상징성이 예사롭지 않다. 처음 원고를 집필할 때부터 검은 꽃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꽃을 섞어야 나오는 검은 꽃’을 떠올리며, 에네켄(어저귀) 이민자들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생각에 검은 꽃을 제목으로 했다고 한다. ‘정체성’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꽂혔다. 많은 한국인의 집착과 착시, 편견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걸 해체하려 한다.

 

쿠바 한인 100년의 오딧세이, 그러나 그들은 '검은 꽃'이 아니다

이민 초기 에네켄밭에서 일했던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의 역사 역시 구한말 다른 한인 이주자들이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다만 1905년 제물포항에서 증기선 일포드호에 올랐던 사람들과 1921년 멕시코 유카탄에서 증기선 타마울리파스호에 오른 사람들의 역정은 다소 결이 다르다. 1회성 집단 이주였고, 한 번 간 뒤에 거의 돌아오지 못한 외방향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도 독한 노동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카탄의 에네켄밭에서처럼 채찍을 맞으며 가축처럼 일한 것은 아니었다. 지옥 같은 계약기간 4년이 끝나고, 다시 ‘더 나은 삶’을 찾아 낯선 섬을 찾아가는 일도 없었다. 쿠바 이민은 극소 단위의 이주였다. 남한에 정착한 많은 탈북민들이 처음부터 남한행을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들 역시 멕시코와 쿠바에서 살려고 떠난 게 아니었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증조부의 나라’를 방문한 쿠바 한인 후손 청년들이 2017년 3월 어느 날 서울의 한 재래시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가운데 앉은 이가 헤로니모 임 김의 손자 넬슨 임 로살레스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히스패닉 문화권에선 한국 못지않게 혈통은 중요한 것 같다. 사람이 무슨 가축인 양 백분율로 표현한다. 에스민다의 할아버지는 8세 때 부모를 따라 유카탄에 갔다가 20대 청년으로 쿠바로 넘어갔다. 이주자 중 한국인 여성이 적었기에 자연스레 현지인과 인연을 섞었고, 혼혈은 대물림됐다. 그 흔적이 부모의 성을 모두 적는 스페인식 이름에 담겨 있다. 이름, 부친의 성, 모친의 성 순으로 쓴다. 쿠바 한인의 또 다른 특성은 이름에 한국 ‘성(姓)’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에스민다의 풀네임이 ‘에스민다 아마도 김’인 것은 그의 외가가 김씨였음을 말해준다. 그들 식으로 굳이 따지자면 에스민다는 25%, 그의 딸 렉시스는 12.5% 한국인이다. 조국(祖國)은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나라’일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무엇이고, 한국에 그들은 무엇일까. 대체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디아스포라의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김영하의 사고에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존재’라는 편견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체성은 장구 모양 모래시계와 비슷하다. 한쪽에서 사라진 분홍빛 모래는 소멸되는 게 아니다. 다른 쪽으로 옮겨갈 뿐이다. 한쪽에서 사라지고, 다른 쪽에서 채워지면서 변모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죄다 옮겨갈 것이다. 그래도 흔적은 남는다. 어디서건 분홍빛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주민은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모래시계에 담겨 살아간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는 건 물감의 세계에서나 상식이다.

디아스포라(dispora)는 그리스어 어원으로 ‘씨를 널리 뿌린다(dia speiro)’는 뜻이라고 한다. 지중해 연안 곳곳에 흩어져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과 애굽 땅에 쫓겨가 살았던 유대인들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어디에 뿌려졌건, 씨의 본질은 소멸되지 않는다. 

2001년 10월 헤로니모 임 김이 아바나 시내에서 택시로 운영하던 자신의 라다 승용차에서 손자 넬슨과 함께 한 모습. 헤로니모는 운전을 하는 동안 노사연의 <만남>을 흥얼거렸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핏줄을 따지는 것은 한국이 좁은 국토에 갇혀 살 때 굳어진 사고다. 주요 7개국(G7)급 선진국이 됐다고 호들갑을 떠는 지금도 한국은 아기 수출에서 세계 정상급이다. 내친 아기들 중 극소수가 미국에서건 프랑스에서건 장관이 되거나 저명인사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가 핏줄을 확인한다. 언론은 본인이 평생 사용하지 않았을 ‘한국 이름’을 우정 확인하고, 적는다. 그 괄호 속의 이름이 본인에게 어떤 슬픔과 좌절, 배신의 흔적인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조셉 전 감독의 다큐영화 <헤로니모>로 널리 알려진 쿠바 한인 2세 헤로니모 임 김(2006년 작고)의 다른 이름은 임은조다. 쿠바 혁명에 뛰어들었던 헤로니모는 고희가 다 되어 아버지의 조국을 방문한 뒤 ‘임은조’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헤로니모로 살았으며, 헤로니모로 묻혔다. 핏줄에 대한 강박심리가 정부 차원으로 가면, 엉뚱하게 경제적 의미로 환산된다. 재외동포들을 해외 경제영토 확장의 교두보 또는 역군으로 간주한다. 역시 핏줄에 갇힌 셈법이다.

쿠바 한인들은 에네켄밭의 불볕 지옥 속에서도 조국을 열망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전후해 빈사의 위기에 처한 중경 임시정부에 적지 않은 성금을 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 바라만 보아도 안타까운 조국, 그 조국의 광복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매끼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의 성미(誠米)를 모아 달러를 만들었다. 반세기가 넘어 한국 사회에 찾아온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들을 ‘애국자의 후손’으로만 보려는 민족 중심 사고 역시 편협하기는 마찬가지다. 증조부, 조부 때의 애국이다. 또다시 그들의 어깨에 버거운 ‘애국’을 얹지 말 일이다. 쿠바에 더 깊이 발 담그고 사는 그들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동포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가슴과 가슴을 맞댈 형제애의 지평이 넓어진다.

코로나 19의 확산 탓에 지난 8일 아바나의 레이디 코브레 성당에서 주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미사를 보고 있다. 레이디 코브레(Our Lady Cobre)는 쿠바의 수호성인이다.  AP연합뉴스

 

추석이 임박한 계절, 새삼 쿠바 한인을 소환한 것은 현지 사정이 어렵다는 소식이 계속 전해지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부른 물가상승과 식량난, 코로나19가 겹쳤다. 도널드 트럼프가 복원해놓은 제재만 200여개다. 쿠바의 ‘인종 샐러드’에 담긴 한인 후손들의 삶도 어려울 터. 쿠바를 관할하는 서정인 주멕시코 대사에게 문의하니 “식량과 구호물자를 아바나 공항에 보내도 시내까지 싣고 갈 차량과 휘발유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전한다. (이점, 평양 사정을 연상케 한다.)

김영하는 틀렸다. 꽃 색깔로 사람의 정체성을 말한다면, 그 색은 사람 수만큼 많을 것이다. 결코 고정되지 않는 색이며, 끝나지 않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배합의 빛깔로 저마다 발현된다. 쿠바 한인의 경우 한국과 멕시코, 쿠바가 섞였다. 떠날 때는 조선의 백성이었고, 카리브해의 무국적자였으며, 잠시 임시정부의 국민이었다가 마침내 쿠바 국민이 됐다. ‘수출된’ 아기들뿐이 아니다. 내쳐진 기민(棄民)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흉터처럼 조국을 부여안고 코스모폴리탄으로 녹아든 사람들이다. 조선족, 고려인, 자이니치, 코리안, 코레아노, 카레이스키 등으로 불리며 새로운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그럼에도 충분히 한국인이다. 김치를 먹고, 돌잡이를 하며, 아리랑의 선율에 어깨가 들썩이기에. 그리하여 에스민다는 외친다.

“모든 한인들이 형제자매로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피가 1% 더 섞였건, 덜 섞였건 우리 모두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영화 <헤로니모> 속 인터뷰) 

 

https://www.khan.co.kr/world/america/article/2021091016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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