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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오늘

영화 <미나리>와 애틀랜타 참사, 재미동포들의 신산한 이민생활

by gino's 2021. 3. 21.

“어쩌다보니 범인과 같은 나라 출신의 저널리스트다. 애도의 뜻과 함께 미안함을 전한다.” 2007년 4월17일. 버지니아 북부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4시간 가까이 자동차를 몰고 도착한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텍 주변은 지극히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전날 재미동포 1.5세 조승희(23)의 총기난사로 32명이 숨진 참극의 현장 같지 않았다. 북적이는 것은 수백명의 취재기자들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위와 같이 말문을 열고 “사건 탓에 한국인 또는 아시아계 학생들에 대한 혐오가 번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미국 남부 바이블벨트가 시작되는 지역이라서 그랬을까. 놀랍게도 단 한 명의 백인 학생, 교수, 교직원, 지역 주민도 기자의 우려에 동의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우연히 범인이 아시아계였을 뿐이지 인종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참사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계 주민들에 대한 혐오범죄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지난 20일 서부 워싱턴주 벨뷰의 벨뷰 다운타운 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아시아계 혐오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승희는 전날 오전 6시47분,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홀의 한 기숙사방에 들어가 다짜고짜 신입생 에밀리를 쏘았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4학년생 라이언도 사살했다. 두 시간쯤 뒤 수업 중이던 강의동 노리스홀에 들어간 그는 강의실 4곳을 돌며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사이 자신의 기숙사 방에 들어가 피묻은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주장을 담은 비디오 녹화 테이프와 글을 NBC방송에 송달한 뒤 배낭을 총기와 400발의 탄알로 채웠다. 총격사건이 수시로 벌어지는 미국이지만, 버지니아텍 사건은 지금까지도 학교 총기참사 중 가장 희생자가 많은 사건으로 기록됐다. 단일범에 의한 최대 인명피해를 낸 총기사건이라는 기록은 9년 뒤 올랜도 나이트클럽 사건으로 바뀌었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총격사건은 각각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갖고 있다. 미국 사회의 총기문화에서 비롯되지만, 극단적인 참극의 원인은 사건마다 차이가 있다. 8세 때 가족과 함께 이민한 조승희는 불안장애, 선택적 함묵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다. 언어장애와 과묵한 성격 탓에 미국 학생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비디오 메시지와 글에 “당한 만큼 총알로 되갚아주겠다” “너희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등의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성장기에 겪은 좌절이 정신질환의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적 모멸감도 겪었던 것으로 고교 동창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백인 남성에 의한 총기극이 벌어진 지난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스파 앞에 경찰이 쳐놓은 노란색 출입금지 테이프가 보인다. EPA연합뉴스

무차별 총격을 하는 범인들은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 희생자들을 ‘인간 이하(subhuman)의 존재’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도덕성 우월성이 있다고 간주한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좌절이 타인을 인간 이하로 보는 도덕적 우월성으로 도치된다. 조승희는 NBC방송에 보낸 비디오에서 금목걸이와 코냑, 메르세데스(벤츠)로 상징한 탐욕과 쾌락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냈다. 적어도 버지니아텍 사건에 ‘정치 바이러스’는 끼어들지 않았다.

지난 16일 오후 5시(현지시간)부터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시티 안팎에서 벌어진 연쇄 총격사건에는 “코로나19는 중국 바이러스”라는 ‘트럼프 바이러스’가 원인의 일부였던 것으로 의심할 근거가 충분하다. 18일 현재 범행 동기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인 당국은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hate crime)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다. 겉으로는 혐오범죄나 인종 문제를 한사코 부인하지만, 내심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미국 사회 인종차별의 단면이다. 17일 범행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말이 정확하게 그 단면을 보여준다. 원인을 직시하기보다 현상을 중시한다. 버지니아텍 사건 당시 직접 말을 건네보았던 백인과 흑인 등 비동양권 주민들은 인종 문제를 배제했지만, 아시아계 학생들은 일부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라는 말로 우려를 드러냈었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짐짓 부인하는 게 인종 문제다.

주로 아시아계 여성들을 상대로 한 총기극의 현장 중 하나인 미국 애틀랜타 골드 스파 앞에서 지난 17일 두 아시아계 여성들이 조화를 놓고 있다. 옆에는 추모의 촛불이 켜 있다. AFP연합뉴스

 

애틀랜타 사건 피해자 8명 중 한인 동포 4명을 포함한 아시아계가 6명인 데다가 해당 마사지숍과 스파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경영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인종을 떼놓고 볼 사안이 아니다. 여기에 피해자 중 7명이 여성인 점은 용의자인 백인 청년 로버트 에런 롱(21)의 뇌리에 인종과 여성, 뒤틀린 도덕적 우월성이 뒤섞여 피해자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지 경찰이 밝힌 한인 여성 피해자들은 60대, 70대에도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을 해온 생활인들이었다. 

용의자 롱이 범행 당시 “아시아계를 다 죽이겠다”고 말했다는 현지 동포언론의 보도는 확인된 게 아니다. 직접인용 부호 없이 보도됐을 뿐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범죄가 확산된 배경을 보면 적어도 범행 동기의 일부였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에서 ‘혐오범죄’ 여부는 법무부 산하 연방수사국(FBI)이 판단한다. 혐오범죄를 “인종과 종교, 장애, 성적 지향, 민족, 젠더 또는 젠더 정체성 등이 전체 또는 부분적인 동기가 돼 사람 또는 재산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라고 규정하는 FBI 정의에 비추어보아도 몇 가지가 겹친다. FBI는 홈페이지에 위와 같은 동기에서 비롯된 “혐오 자체는 범죄가 아니다”라면서 “FBI는 미국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도 보호받아야 할 권리라는 점을 유념하고 있다”는 설명을 우정 덧붙여놓았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3월18일 워싱턴의 백악관에 조기가 걸려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애틀란타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애틀랜타 참사가 미국 곳곳에서 반 아시아계 혐오범죄 시위로 번지자 워싱턴의 연방의사당도 조기를 게양했다. EPA연합뉴스

 

‘아시아·태평양계 주민 혐오 반대(Stop AAPI Hate·이하 AAPI)’가 공교롭게 애틀랜타 사건 당일 발표한 연례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3월19일부터 올 2월 말까지 미국 내에서 각종 아시아계 대상 혐오 사례가 3795건 발생했다. 모두 범죄로 이어진 숫자는 아니다. 욕설과 비방, 위협, 신체 공격 등의 사례들이다. 올해 초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84세 태국계 노인이 폭행을 당해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사회 일각에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AAPI 보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남성보다 여성이 2.3배 많은 피해를 입었고, 중국계(42.2%)에 이어 한국계(14.8%) 피해 사례가 두 번째로 많다는 점이다.

인종과 젠더는 총구 앞에서도 차별받는다. 무차별 난사이건, 사적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이건 피해는 여성과 유색인종에 더 집중된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3~2014년 미국에서 발생한 1만18건의 여성 살해사건을 분석한 결과 특히 아프리카계 여성은 다른 인종보다 두 배 많이 총기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전 연령층에서 평균 10만명당 2명이 살해당했다. 인종별로 아프리카계 여성이 4.4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아메리칸 인디언(4.3명), 히스패닉(1.8명) 순이었다. 아시아계 여성은 1.2명으로 비히스패닉 백인 여성(1.5명)보다 적었다. 아시아계 주민에 대한 혐오 또는 혐오범죄가 늘어난 것은 불행히도 코로나19 이후의 일이다.

3월20일 미국 워싱턴주 벨빌의 벨빌 다운타운 공원에서 열린 '아시아계 혐오 중단(Stop Asian Hate)' 시위 참가자들이 비가오는 와중에도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로이턴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이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대확산(팬데믹)으로 규정한 지 1년을 맞아 한 지난 11일 백악관 연설에서 강조한 것도 그 점이다. 바이러스가 야기한 사회현상의 하나로 아시아계에 대한 공격과 괴롭힘, 비난 및 희생양화 등 ‘사악한’ 혐오범죄의 증가를 들었다. “그것은 잘못됐고, 미국적인 게 아니며, 반드시 중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상은 지극히 ‘미국적 현실’이다. 

버지니아텍 사건과 애틀랜타 사건은 우리에게 수많은 사건 중 하나가 아니다. 숫자나 통계로 설명할 주제도 아니다. 재미동포와 연관됐기 때문이다. 버지니아텍에선 가해자였고, 애틀랜타에서는 피해자였던 점이 다를 뿐이다. 

애틀랜타는 미국에서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 하나지만,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시카고 등지와 다른 특징이 있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이점 때문에 이민생활에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한인 이민가족들이 제2의 도전을 하는 곳이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지 않고 애틀랜타 시티 안팎에 집중 거주하는 것도 특징이다. 주 인구 1617만명(2019년) 중 공식 한인 인구는 6만9230명이지만, 10만명을 웃돈다는 게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추정이다. 1970년대 이후 한인 이민자들의 직업은 초기 청과물 거래, 세탁소, 슈퍼마켓 및 주유소 등으로 시작해 전문직 종사자가 늘고 있다. 일부는 마사지숍이나 스파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여성들이 마사지숍을 비롯한 성인업소지역(레드존)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아시아계 여성들을 성적 일용품으로 여기는 인종차별적 선입관이 있어서다. 사건을 수사 중인 체로키 카운티 경찰은 용의자 롱이 인종적 편견이 범행 동기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성 중독증이 있으며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놓았다. 생업은 다를지언정 많은 한인 이민가정은 자녀교육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다. 아칸소주 한 귀퉁이에 씨앗을 뿌렸던 영화 <미나리(Minari)>(리 아이작 정 감독)의 이민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마침 <미나리>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관심을 끌고 있는 시점, 애틀랜타 사건은 동포들의 신산한 이민생활이 1980년대 일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고난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대확산한 지난 1년여 동안 인종주의는 또 다른 ‘인간 전염병’으로 번지고 있다. 인종차별 앞에서는 누구나 자유롭지 않다. 동전의 양면처럼 누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확산돼온 중국인 혐오 역시 임계치에 접근한 지 오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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