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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미국 대선, 엘리자베스 워런은 왜 '특별한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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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o's 2019. 2. 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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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지난 1월12일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한 유세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맨체스터/AP연합뉴스



“어린 시절 오클라호마에서 자랐다. 위로 군복무를 한 오빠가 세명 있었고 나는 늦둥이였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더 이상 경비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낯선 단어들이 들렸다. 주택할부금(모기지)과 주택몰수 등의 무거운 단어들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가장 좋은 드레스를 침대 위에 꺼내놓은 채 울었다. 그러면서 집은 빼앗길 수없다고, 빼앗기지 않겠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어머니는 오십세가 되도록 단 한번도 직업을 갖지 않았었다. 어머니가 그 드레스를 입고 걸어나가 취업한 곳은 시어스 백화점이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받아온 최저임금은 우리 집과 우리 가족을 지켜냈다.”


지난 해 12월14일 미국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69·민주·매사추세츠)이 매릴랜드주 모건 스테이트대학(MSU)에서 한 졸업식 연설의 일부분이다. MSU는 매릴랜드의 유서깊은 흑인 대학이다. 정치인의 말 처럼 허망한 것도 드물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해법을 들고 나온 정치인의 말은 귀기울일 가치가 있다. 같은 달 3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워런 의원의 철학과 소신이 담겨 있는 연설문이다.


워런은 생계를 돕기위해 13세 때부터 이모의 식당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시어스백화점에서 받은 최저임금은 매달 주택할부금을 내고, 3인 가족의 기본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풀타임으로 최저임금을 받아도 아이 한명을 둔 싱글맘의 생활조차 지탱하지 못한다. 최저임금의 가치가 줄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워런이 졸업생들에게 던진 화두이자,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룰 역시 중요하다”고 역설한 까닭이다.



엘리자베스 워렌 미국 상원의원이 지난 1월5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집회에서 청중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고 있다. 디모인/AP연합뉴스 



평범한 미국인이 꿈꾸는 생활은 소박하다. 열심히 일해서 담보대출로 집을 얻은 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모기지 빚을 모두 갚은 뒤에는 친지들을 초청, 관련서류를 찢어버리면서 파티를 벌인다. 은퇴 뒤에는 사회보장에 의존해 살다가 집을 자식들에게 넘겨준다. 자식들은 그 집을 기반으로 선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있다. 소소한 행복의 순환을 깨뜨린 것은 바로 일그러진 룰이었다. 워렌이 “미국이 다시 모두에게 같은 룰을 적용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룰을 만드는 워싱턴, 그 핵심인 백악관에 가겠다고 뛰어든 워런 정치의 출발점이다.


워런은 아직 민주당 대선후보군 가운데 약체다. 지난 27일 현재 폴리티코와 CNN 등 최근 두달 간 조사된 여론조사결과 민주당 대선후보 중에서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33.0%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이 11.8%로 그 뒤를 이었다. 워런은 베토 오루크 전 하원의원(6.8%), 캐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캘리포니아·5.3%), 코리 부커 상원의원(뉴저지·4.5%)에 이어 6위(4.3%)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 진보의 특별한 희망으로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전혀 새로운 품종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 중도좌파 정당들은 세계화가 심화된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일제히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모두 ‘제3의 길’을 선택했다. 말이 제3의 길이지 자본, 특히 금융자본의 논리에 순응해 세계화의 대세에 따르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중도좌파 정당들의 지지기반이었던 저소득 노동계층이 떠나갔다. 2017년 4월 프랑스 대선 1차투표에서 브누아 아몽 사회당 후보가 6.35%로 참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멋진 연설과 그럴싸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그 역시 자본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중도 좌파가 실패한 자리에 유권자들의 분노와 증오에 뿌리를 박은 포퓰리즘이 들어서 영향력을 넓혀온 게 작금의 현실이다.


워런 의원(민주·매사추세츠)이 지난 1월5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에 재선한 워렌 의원은 이미 100만명의 정치자금 제공자의 명단을 확보해놓은 상태다.  디모인/AP연합뉴스 


자본에 길들여진 중도좌파를 질타하며 나온 사람들은 분노하는 대중을 위해 싸우겠다고 나선 노 투사들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 앵수미즈)’의 장 뤼크 멜랑숑(67)이 대선 1차 투표에서 19.62%를 득표, 기염을 토했다. 미국에서는 샌더스 의원(77)이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힐러리 클린턴이 대표했던 민주당 주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주류는 월스리트 금융자본이 건네는 거액의 정치자금에 취해 보통사람들의 민심에 둔감한 정치인들이다. 개혁의 정신, 중도좌파의 가치를 팽개쳤다. 그 결과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이 어려워지는 데 대한 샌더스의 해법은 인위적인 부의 재분배였다.


부자 또는 대기업으로 부터 세금을 더 걷어 서민과 중산층을 부양하고, 무상 대학교육, 복지 예산 증액이 전통적인 좌파의 방식이다. 워런 역시 조세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 1월25일 5000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상위 0.1%의 부자들에게 극부유세 법안을 발표했다. 10년 간 2.75조 달러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워렌에겐 다른 무엇이 있다. 부의 재분배(re-distribution)가 아닌, ‘부의 선분배(pre-distribution)’가 그 핵심 개념이다. 불평등이 벌어진 뒤 그 폐해를 보완하던 관행에 머물지 않고 사전에 불평등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8월 워런이 발의한 ‘책임지는 자본주의 법안(Accountable Capitalism Act·ACA)’에 그 개요가 담겨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는 시장이 작동토록 할 의무가 있다. 기업법과 금융거래법, 노동법, 반독점법 등이 존재하는 이유다. 10억달러 이상 납세 기업의 경우 이사진의 최소 40%를 노동자들로 뽑는 ‘기업 시민권’을 출발점으로 한다. 동시에 기업이 특정 정치인 또는 특정 선거운동캠프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려면, 주주 및 이사 75%의 찬성을 확보하도록 했다. 회사 임원들로 하여금 보상으로 받은 주식을 최소 5년 동안 보유토록 하는 규정도 있다.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력을 경비절감의 대상이 아닌, 투자대상으로 여기도록 유도할 수있다. 자연스레 부의 선분배가 이뤄진다. 또한 자본의 논리에 의한 정치자금 제공으로 트럼프처럼 친 기업, 반 노동 성향의 정치인이 득세하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오른쪽) 지지연설을 하는 워런 의원. 클린턴 후보는 워런은 물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를 받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불러온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는 기업 임원들과 월가의 탐욕이 불렀다. 미국 경제 뿐아니라 전세계를 금융위기로 몰아갔다.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대신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와 기업 인수·합병으로 일시적으로 주가를 올린 뒤 재빠르게 그 성과를 천문학적인 보너스로 챙겼던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이 저지른 것이다. 노동자의 대표가 이사회에 들어가면 경영진의 독단을 차단할 수있는 장치를 갖게 된다. 주가를 올리기 위해 인건비 절감에 나서는 대신, 수익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줌으로써 보통사람들의 생계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다. 워런이 법안을 발의하며 내놓은 보도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거대기업들은 수익의 절반 가까이를 주주들에게 돌려준 반면에 나머지를 온전히 기업에 재투자했다. 하지만 지난 10년 간 거대기업들은 수익의 93%를 주주에게 배당했다. 노동자 또는 장기투자에 투입될 수 있었던 수조 달러를 주주들이 독식한 셈이다. 기업의 수익성과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모두 좋아져도 임금 인상으로 연결되지 못한 까닭이다. 미국의 상위 10%의 부자들이 전체 주식의 84%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주주우선주의는 양극화를 가중시킬 뿐이다. 워런은 금융위기 당시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기업들이 주주들에게만 책임을 져선 안된다”면서 “주주 뿐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응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동력은 분노와 증오였다. 특히 백인 저소득층의 지지가 컸다. 워렌의 제안은 버락 오바마에게 표를 주었다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인위적인 부의 재분배나 대규모 복지예산 지출은 모두 ‘큰 정부’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 어렵다. 워런의 선분배 방식은 그러한 거부감을 피해갈 수있다. 익히 예상되는 진보진영의 요란한 재분배 구호에 익히 예상하고 있던 보수진영의 로비와 반격으로 인해 발생할 온갖 잡음을 사전에 조용히 제거할 수있는 것이다. 실제로 워런이 ACA의 쌍둥이 법안으로 작년 4월 대표 발의한 노동보상법안(RWA)이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기업들의 부당한 자사주 매입을 금하는 동시에 모든 기업이 이사의 3분의 1을 노동자들이 선출토록 한 RWA에 관한 여론조사기관 시비스 조사결과 민주당 지지성향 응답자의 75%(반대 9%)는 물론 공화당 지지성향 응답자의 43%(반대 31%)가 지지했다. 워런의 제안은 여느 정치인의 공약과 결을 달리한다. 학자이자 정책입안가로서 쌓아온 견고한 내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텍사스대, 펜실베이니아대,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미국 내 손꼽히는 파산법 전문가이던 워렌이 공적영역에 진출한 것은 2007~2008년 금융위기 이후다. 문제자산 구제프로그램에 대한 연방의회 감독패널의 의장 겸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제1특별보좌역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수술에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약화시킨 금융규제법(프랭크-도드법) 제정의 산파역이기도 하다.




워런의 대선 도전은 결코 녹록치 않은 여정을 예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내년 여름 민주당 전당대회 전까지 당내 지지를 얻어야 한다. 산넘어 산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재미를 본 프레임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여성’이자 ‘워싱턴 기득권’이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미투 열풍이 불기 시작했지만 보수적 유권자들에게 여성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워런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후예라는 것을 빌미로 트럼프는 일찌감치 그를 ‘포카 혼타스’라고 조롱하며 인종 프레임까지 덧씌우고 있다. 그럼에도 워런과 같은 미국 대선후보의 생각을 엿볼 수있는 것은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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