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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세계읽기]트럼프의 유엔연설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

포퓰리즘 산책

by gino's 2017. 9. 2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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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19일(현지시간) 제72차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주권·안보·번영의 기본은 애국심, ‘트럼프 독트린’의 탄생

“뉴욕에 오신걸 환영한다… 신이여, 미국에 축복을.(Welcome to New York…God bless America)”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19일 유엔 총회 첫 연설에서 쏟아놓은 말들은 가장 솔직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세계관을 천명한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미국)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결과에 따라 움직인다”면서 공허한 가치와 이상 보다는 실제적인 결과물을 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대의와 명분을 위해 잇속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미국 대통령들이 유엔 총회 연설 기회를 통해 이상적인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강조해온 것과 극명하게 대조됐다. 트럼프 역시 주권·안보·번영이라는 3개의 ‘아름다운 기둥’이 떠받치는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 조화와 우애, 반 테러· 반 극단주의, 공정무역의 가치를 말했다. 현학이나 가식, 군더더기가 없이 내놓은 점이 종전 미국 대통령들과 다를 뿐이다. ‘아메리칸 포퓰리즘 선언’이자, ‘트럼프 독트린’을 세계에 알린 41분 연설이었다. 우리에겐 “미국과 동맹을 지켜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하게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한마디가 더 크게 들린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트럼프가 그 막대한 전비를 미국이 부담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트럼프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이번 연설문 처럼 좋은 텍스트는 없는 것 같다.



■“나는 미국 퍼스트(America First) 할테니 당신들은 당신 나라 퍼스트 하라”

세계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선언에 기함을 하고 있지만 기실, 어떤 미국 대통령도 자국의 이해에서 벗어난 적은 없다. 트럼프는 터놓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 미국을 최우선 할거다. 당신들도 자기나라 지도자로서 당신 나라를 최우선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면서 각각 자기나라의 주권과 번영을 위해 힘쓰자고 말했다. 트럼프가 처음 박수를 받은 대목이다. 그러면서 “하지만 미국은 더이상 이용당하거나, 일방적인 거래를 할 수없다. 대통령직을 갖고 있는 한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미국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온 것이 현실주의 선언이다. “미국은 분쟁과 갈등이 아닌, 조화와 우애를 원한다. 하지만 이념이 아닌, 결과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대외정책을 ‘원칙적 현실주의(principled realism)’라고 정의했다. 목표와 이해, 가치를 공유하는데 뿌리를 둔 현실주의라는 뜻이다.


■‘현실주의’의 지정학, 북한·이란의 변죽을 울려 중국·러시아에 경고

트럼프의 ‘원칙 현실주의’에 따르면 세계에는 지금 국제 평화는 물론 자국민을 위협하는 깡패정권이 2개 있다. 북한과 이란이다. 특히 북한은 모든 악의 결정판이다. 주민 수백만명의 굶주림, 투옥, 고문, 살해를 저지르고 있다. 버지니아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죽게 했고, 자기 형 김정남을 독살했으며, 13세 일본 소녀(요코다 메구미)를 납치해 일본어 선생으로 썼다.(요코다를 언급한 데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그간 트럼프에게 기울여온 노력이 엿보인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한 범죄자들의 무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면서 북한을 ‘타락한 정권’이라고 못박았다.


유엔 안보리가 최근 두개의 대북 제재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중국과 러시아에 특별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 직전, “우크라이나에서부터 남중국해까지 해당국가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했다. 2500만 인구의 북한을 “완전 파괴하겠다”는 대목에서 총회장은 싸늘해졌다.

(사진)

(이란 반체제 주민들이 9월20일 유엔 총회가 열리고 있는 뉴욕 유엔본부 밖에서 이란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란의 압제를 비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란계 미국인 단체가 연 시위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도 이러한 시위를 벌였었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으로 수십만명이 죽고, 수백만명이 난민이 된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AP연합뉴스)


트럼프에게 이란은 ‘부패한 독재’의 가면을 쓴 나라다. 민주주의는 분장일 뿐이다. “이란 핵합의는 미국이 한 최악의 가장 일방적인 거래다.” 해서 “수출품이 폭력과 유혈, 혼란 뿐인 황폐화된 깡패국가가 (핵합의 덕에) 미사일과 궁극적으로는 핵프로그램을 구축하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다.” 트럼프는 그러나 아직 이란 핵합의를 폐기할 명분이 없기 때문인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북한과 이란이 지역 및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깡패국가라면, 베네수엘라는 자국민을 비참하게 만드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문제는 사회주의를 부실하게 이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충실하게 이행했기 때문”이라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옛 소련에서 쿠바, 베네수엘라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행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빈곤과 실패에 직면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현실주의’의 경제학, 안보든 번영이든 ‘더치페이’하자

대외원조를 중심으로 국무부 예산을 3분의 1정도 삭감한 트럼프의 세계관은 이번 연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트럼프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과 기아, 에이즈, 말라리아, 재해, 인권탄압에 신음하는 국가들을 연민해왔다. 마샬플랜을 비롯해 국제사회에 수십억달러를 공여해왔다. 하지만 193개 회원국의 하나인 미국이 유엔 운영예산의 22%를 부담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시리아 난민을 수용한 요르단·터키·레바논의 역할에 감사하면서도 트럼프가 안전하고, 책임성 있으며, 인도적 접근으로 제시한 난민정책은 비용과 직결돼 있다. 난민 1명을 미국에 받아들이는 비용으로 10명을 해당 지역에서 수용할 수 있다는 셈법이다. 최근 난민들을 고국 근처에 수용하는 것을 모색키로 한 주요 20개국(G20))의 결의와도 일치한다.


유엔의 고상한 창설이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전복시키려는 국가들이 유엔을 하이재킹(납치)했다면서, 끔찍한 인도적 기록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 유엔 인권위원회 구성원으로 앉아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결론은 미국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존중할테니 “각국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안전하고 번영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더 큰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현실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아름다운 애국심’

교역과 관련해 트럼프가 강조한 두가지는 공정성과 호혜성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미국민은 거대 다국적 무역협정과 무책임한 국제법정, 강력한 글로벌 관료주의가 최선의 성공책이라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약속들이 지나간 뒤 수백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수천개의 공장이 사라졌다. 그 결과 “한때 미국 번영의 초석이었던 위대한 중산층은 잊힌 채 내버려졌다. 하지만 더 이상 잊히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다시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는 물론 프랑스의 극우 국민전선(FN) 마린 르펜의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트럼프가 세개의 ‘아름다운 기둥’으로 내세운 가치는 주권·안보·번영이다. 그 세가지를 관통하는 상위의 개념이 애국심(Patriotism)이다. 트럼프는 생뚱맞게도 “유엔과 전 세계인들이 지금 직면한 진정한 문제는 바로 ‘우리는 여전히 애국적인가’라는 물음”이라고 말했다. “각국의 정신과 자존심, 국민중심 사고와 함께 애국심을 부흥시켜야 한다”고도 목청을 높였다. 주권과 애국심을 통치기반으로 삼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터키 등의 ‘스트롱맨’들이 좋아할 주장이다.


크림반도를 병합한 러시아와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이 모두 그 아름다운 ‘주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고 하면 곧바로 모순에 부딪힌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모순과 자가당착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세계화의 연대기가 시작된 지 40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 주권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은 지독한 패러독스다. 하지만 그것이 트럼프의 세계관이고, 세계는 그와 함께 몇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비난은 풍성하지만, 그 생각의 밑둥을 찬찬이 뜯어보는 작업은 빈곤하다. 동의하든 안하든 그의 생각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실주의자’ 또는 ‘포퓰리스트’ 미국 대통령과 공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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