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한국이 알래스카산 액화천연가스(LNG)를 구매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한·미 간) 관세협상을 비롯한 다른 사안이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모든 건 가스 구매에서 출발한다."
인구 74만 명의 알래스카 주지사가 이틀 동안 대한민국을 휘젓고 다녔다. 기업체 관계자들은 물론, 한덕수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에서부터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재명 민주당 대표, 김동연 경기지사까지 두루 만나며 한국의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를 권했다. 이 정도 비중의 인물을 거국적으로 맞이하는 장면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SK그룹과 한화, 포스코 인터내셔널 관계자들도 만났다.
모두에 소개한 발언은 마이크 던리비 알래스카 주지사가 지난 26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말(연합뉴스). 주지사 입장에서 알래스카산 LNG 세일즈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의 발언 수위와 내용이 선을 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책임한 사업 전망 홍보는 물론, "관세 협상에 불리할 수도 있다"라는 간접적인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해괴한 해프닝이 비롯된 지점은 지난 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내놓은 한마디였다. "나의 행정부는 또 알래스카의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한 가스관 건설에 노력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및 다른 나라들이 수조 달러의 투자에서 우리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미국 지하에 묻힌 '액체 황금(원유)'를 최대한 채굴하겠다는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정책을 강조한 뒤 한 말로, 트럼프 특유의 과장이 풍년이다. 실제 사업 규모는 440억 달러(약 64조 원). 가스관 규모 역시 세계 최대 수준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 및 기업이 구체적으로 관심을 보인다기보다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해체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압력에 대비하는 방안의 하나로 검토하는 단계. 트럼프가 이를 댓바람에 공개한 것은 "당장 협상에 착수하라"는 신호였다. 일개 주지사가 대만, 한국, 일본을 순회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인 배경이다.
던리비 주지사는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들은 (구매 혜택 외에도) 우리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추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면서 천연가스 액화용 압축기 모듈과 LNG선 수주 가능성을 꼽았다. 그러나 "한국 기업에 대해 별도의 보조금이나 인센티브는 없을 것"이라면서 프로젝트 참여 자체로 충분한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던리비를 수행한 듀발 글렌파큰 그룹 최고경영자는 LNG 100만t에 운반선 2척이 필요한 만큼 2000만t 생산에 총 40척의 LNG선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어떤 기업이건 프로젝트 참여가 경제적으론 도박이라는 점이다.
우선 가스관은 물론 액화시설을 갖춘 터미널까지 건설하는 것은 알래스카의 연중 최저 영하 40도의 혹독한 기후와 인프라의 규모 탓에 추가비용 발생 가능성이 높다. 멕시코만(미국만)이 이미 갖춰진 미국 내 다른 LNG 터미널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쟁력, 글로벌 LNG 수요량과 가격 변화에 따른 리스크, 환경 훼손 리스크를 안고 있다. 미국 엑손모빌을 비롯해 글로벌 석유·가스 메이저들이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다. 알래스카 주정부의 수십 년 숙원사업이면서 이뤄지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직접 사업 홍보에 나선 것 자체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유, 가스 생산을 최대한 늘려 지역 경제를 살리는 한편 미국 내 에너지 가격을 낮추려는 목적 때문이다. 생활물가 인하는 트럼프의 핵심 공약.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알래스카 노스 슬로프(North Slops)~니키스키 간 약 1300㎞의 가스관 건설 △니키스키 천연가스의 액화 설비를 갖춘 수출용 LNG 터미널 건설 △LNG 구매 등 크게 세 가지가 포함된다. 천연가스 매장지에서 LNG 터미널까지 파이프라인을 깔고, 연간 2000만t을 액화한 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판매하겠다는 계획. 터미널 건설에만 전체 사업비의 50~66%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경제 안보와 지정학적 안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무작정 뛰어들라는 압력이다. 채산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각국 정부의 지원이 뒤따라야 하며, 이는 혈세로 감당해야 한다. 국민 모두의 호주머니를 털어갈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외국 정부 및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끌어들일 때는 경제적, 비경제적 대가를 막연하게 약속하지만 정작 실행단계에 접어들면 무시해 온 게 트럼프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당장 오는 2028년까지 총 210억 달러(31조 원) 투자를 약속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백악관에 불러들여 한껏 상찬했지만, 모든 수입차에 대한 관세 25% 부과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건은 동아시아 각국에 모두 고민을 안겨 준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2월 방미 당시 적극적인 참여 의향을 밝혔고, 트럼프는 이를 성과로 홍보하면서 추가 압력을 가했다. 아직 관심 표명 수준이다.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지정학적 안보 위협을 크게 느끼는 대만은 더 적극적이다. 국영 대만중유공사(CPC)는 지난 20일 타이베이에서 알래스카 가스라인 개발공사(AGDC)와 LNG 구매·투자 의향서를 체결했다. 던리비의 방문을 계기로 이뤄진 것. 그러나 일본의 양대 가스공급기업인 오사카 가스의 후지와라 마사타카 회장은 26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이미 2030년대 중반까지 LNG 수입 물량을 확보했다"라면서 "갑자기 미국으로부터 LNG 추가 수입 요청을 받았지만, 당장 그렇게 할 여력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상적인 사업가의 말이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공개된 세부사항이 충분치 않다면서 일본을 방문할 알래스카 관계자를 만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오사카 가스는 이미 텍사스 프리포트 LNG로부터 초냉각 연료를 공급받고 있다.
다행히 방한한 던리비와 투자의향서를 체결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거국적인 환영 장면은 국내적으로 두 가지 메시지를 준다. 우선 기업 차원에서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게 만들며, 동시에 정부와 국회의 지원을 담보한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 트럼프의 막무가내 관세는 이미 부과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압력, 즉 사업 참여를 안 할 경우 입게 될 피해가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도 아니다. 동아시아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미국은 국외자가 아니다. 한국, 일본, 대만과 함께 안고 있는 리스크다. 트럼프 시대 안보는 경제와 관련돼 있지만, 국방예산을 비롯해 필요한 부문에 한정된다. 던리비의 동아시아 순방은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뛰는 격"이다.
방한한 미국 주지사를 대한민국 수뇌부가 '만나주는' 게 아주 드문 건 아니다. 더구나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지 석 달이 넘도록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한 미국의 장관급 고위공무원은 없었다. 던리비가 방문하니 대리만족을 하겠다는 건지, 밥값을 하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챙기려는 건지 분명치 않다. 특히 대통령 권한대행. 국회 추천 헌재 재판관 임명이라는 헌법적 의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장본인이 국민에게 내보일 장면은 아니다. 비정상, 비상식에 더해 국민 모독이다.
제1야당 대표가 일개 주지사를 만나는 건 평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다. 의식해야 할 오디언스는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 국민도 바라본다. 알래스카 LNG프로젝트 참여 압박의 불온한 성격이 드러난 상황에서 비전략적이라고 본다. 경기 지사가 외교 역량을 과시하는 모양새 역시 단견이다. 때와 대상을 잘못 골랐다. 경기도 부천시 정도의 인구를 가진 일개 주지사에게 보인 대한민국의 '과공'은 국민에 대한 '비례'로 읽을 수밖에 없다. 많은 국민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말, 왜들 이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