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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시 이란 대통령 헬기 추락사 "미국 제재가 죽였다"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6. 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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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는 산악 지방에 추락하기 전까지 예정된 항로를 비행하고 있었다. 사고 헬기에서 총탄 흔적이나 기체 외부가 파손된 증거는 없었고, 지상관제 당국과의 교신에서도 어떠한 비정상적 정황이 없었다." 이란군 총참모부가 23일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의 헬기 추락 사고 사흘 만에 1차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고로 라이시 대통령과 호세인 아미르아돌라히안 외교장관 등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린 23일 마슈하드 시내에서 추모객들이 그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4.5.23. AFP 연합뉴스

이란군 사고 1차 보고서

총참모부는 "조사는 계속될 것이며, 추가로 확인되는 사실을 공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난 20일 오전 5시쯤 사고 헬기가 추락하면서 화염에 휩싸였다. 얼마 안 돼 구조팀들이 도착했지만, 짙은 안개와 악천후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건의 전모다. 테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7개월째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학살 탓에 중동 정세가 불안하던 차였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다 되어가면서 두 가지 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서방 주요 매체들은 사고 직후 뚜렷한 근거 없이 이번 사고로 중동이 격랑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쏟아냈다. 경제난에 대한 불만으로 수년 전부터 이란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지적됐지만, 중동 정세 악화나 국내 소요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외려 범이슬람권 차원에서 이란과 화해, 연대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튀르키예와 파키스탄, 레바논, 이라크 등 이슬람권에서 일제히 '애도의 날'을 선포하고, 이란 국민과 슬픔을 함께했다. 수니, 시아파를 막론한 연대였다. 역시 걸프 지역 수니파 국가인 동시에 2016년 이란과 단교했던 하마드 빈 이사 알칼리파 바레인 국왕은 23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길에 "이란과 관계 정상화를 늦출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란에 관계 복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바레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걸프국가의 하나로 2020년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다짐한 아브라함 협정 당사국이다. 바레인의 대이란 태세 변화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이 6개월째에 접어들면서 국제사회와 이슬람권의 반이스라엘 흐름을 반영한다. 하마드 국왕의 모스크바 방문 목적의 하나가 아랍권을 대표해 팔레스타인 평화회의 개최를 준비하면서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지난 16일 바레인이 의장국으로 주최한 제33차 아랍연맹 정상회의의 결정 사항이다.

20일(현지시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탄 헬기 추락 사고 현장인 이란 동아제르바이잔주 바르즈건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잔해. 모흐센 만수리 이란 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기가 전소된 채 발견됐으며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란 국영TV IRIB 화면 캡처] 2024.05.20. EPA 연합뉴스

바레인, "이란과 수교 의향"

지난 4월 이스라엘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영사관 폭격과 이란의 제한된 이스라엘 공습 뒤 아랍권이 팔레스타인 평화를 의제로 이란과 연대하려는 흐름을 반영한다. 라이시의 사망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는 중동의 변화를 견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란 정부는 네 곳에서 국가 차원의 장례의식을 치렀다. 추락 사고가 발생한 이란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주 타브리즈 광장에서 첫 추모행사를 가진 뒤 같은날 이슬람 성지이자, 라이시가 신학공부를 했던 중부 곰에서 두 번째 장례식을 치렀다. 22일에는 테헤란의 모살라 모스크와 테헤란 대학교에서 추도행사 및 예배가 있었다.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테헤란 장례 예배를 집전하면서 "우리는 그에게서 좋은 것밖에는 보지 못했다"고 기도했다.(연합뉴스)

23일에는 남호라산주 비르잔드를 거쳐 시아파 최대 성지이자 라이시의 고향인 마슈하드에서 마지막 장례 행사를 치른 뒤 이맘 알리 레자 영묘에 매장했다. 망자의 삶의 궤적과 이슬람 성지를 되밟는 장례 행로였다. 테헤란과 마슈하드 장례식에는 각각 수백만 명의 추모 인파가 운집했다. 이란 정부는 관련법에 따라 6월 28일 직선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아랍연맹 정상회의 의장 자격으로 23일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한 하마드 빈 이사 알칼리파 바레인 국왕이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4.5.23. EPA 연합뉴스

라이시 사망을 부른 헬기 추락 사고가 미국과 서방 '제재의 저주'였다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란 정부의 발표대로 악천후와 기체 결함이었다. 이중 기체 결함과 관련해 자바드 자리프 전 이란 외교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각각 미국의 제재 때문에 적절한 부품을 확보하기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3일 사고 원인의 하나로 이란이 제재로 인해 신기종 헬기는 물론, 부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점을 지적,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라이시가 탑승했던 미국산 벨-212 헬기는 베트남전에 사용됐던 낡은 기종. 이란 공군이 1994년 도입한 지 20년이 됐다.

국무부 "기종 잘못 택한 이란 잘못"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제재 원인 주장에 대해 "악천후 속에 낡은 헬기를 사용한 이란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면서 "이란이 항공기를 테러단체 지원에 사용하는 한 제재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헬기뿐 아니라 민항기와 군용기의 안전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방 항공기 제작업체들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신기종 및 부품 제공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란에 금지 품목을 제공하는 제3국 기업을 미국 은행시스템에서 퇴출시킨다는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를 우려해서였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JCPOA, 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도출한 뒤 제재 일부의 해제를 약속하자 이란은 에어버스 200여 대의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3년 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를 일방 파기한 뒤 중단됐다. 합의 참여국인 안보리 상임이사국 4국과 독일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반대했었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파기 결정을 승계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의 국장이 열린 23일 이란 마슈하드의 모스크에서 수백만 명이 인파가 몰려 추도했다. 2024.5.23. AFP 연합뉴스

미국은 이란이 팔레스타인 하마스를 비롯해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지의 시아파 무장집단을 지원하는 점을 들어 제재 해제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해왔다. 핵합의를 '입구'로 이란과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테러 지원 문제를 논의할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 노력은커녕 무한 대립과 군사주의에 치중해 온 바이든 행정부 대외 정책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21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도 "역내 안보 저해 행위에 있어서는 이란의 책임을 계속 물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명의로 20일 이란 국가수반 앞으로 조전을 보낸 데 이어 23일에는 최선희 외무상이 이란 외교부 앞으로 아미르아돌라히안 외교장관의 사망에 위로 전문을 보냈다. 우리 정부는 김홍균 외교부 제1차관이 주한 이란 대사관을 방문해 조의를 전했다. 26일 주이란 대사가 테헤란에서 열리는 현지 외교단 조문 기회에 정부 차원의 조의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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