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동쪽 끝의 나르바(Narva). 나르바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붙어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쪽 경계이기도 하다. 인종과 국적 비율이 독특하다. 인종은 러시아인이 87%, 에스토니아인 5.2%이지만, 2013년 현재 국적은 에스토니아 46%로 러시아(36%)보다 많다. 18세기부터 제정러시아 영토였다가 독립전쟁과 독-소 전쟁, 소련 귀속, 1991년 독립까지 근현대사의 흔적이 인구 구성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부 간 갈등이 높아지면서 우선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졌다. 러시아 TV 시청도 금지됐다. 나르바 주민들의 러시아 국적 취득자가 늘어나는 이유다. 2022년 6월 10일엔 에스토니아 외교부가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나르바를 점령한 것을 찬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에 엄중하게 경고했다. 푸틴 정부는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발트해 3국 점령은 정당했으며, 특히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고, 발트 3국의 독립을 평화적으로 허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로 기억하는 역사가 다르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국은 소련군의 점령과 이후 소련 시대 압제를 악몽으로 기억한다. 1991년 독립을 희망하며 발트 3국 주민 200만 명이 펼친 '인간 띠 잇기'의 기억도 공유한다.
잠잠하던 '역사 전쟁'이 우크라 전쟁 이후 되살아났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같은 해 8월 나르바 도심에 있던 소련군의 전쟁기념물 위에 있던 T-34탱크를 철거, 탈린 인근 빔시 전쟁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카자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는 전몰자 묘지가 있는 해당 지역을 중립적인 추념 공간으로 바꿨다. 러시아는 반나치 해방군이었던 소련군의 상징을 없앤 것에 항의하며 국경 부근 자국 영토에 새로운 T-34 기념물을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발트 3국이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훈련을 강화한 터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은 긴장을 더 높였다. 같은 해 9월 발트 3국은 솅겐 조약을 적용했던 러시아 국적자의 입국을 막았다. 에스토니아 의회는 러시아를 '테러 국가'로 지정했다. 에스토니아는 작년 1월 2104만 달러(약 286억 원)에 달하는 러시아 자산을 동결했다. 서로 자국 주재 외교관을 맞추방한 것도 이즈음이다. 작년 5월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발트 3국은 러시아의 지방"이라는 말을 자신의 X 계정에 올려 물의를 빚었다.
민족의 피는 분쟁의 피를 부른다. 민족주의 정서는 종종 전쟁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타국의 한 귀퉁이에 동족이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받는다면, 휘발성이 높아진다. 정치가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면, 더 파멸적이다. 중, 동부유럽과 옛 소련 지역에서는 민족분규가 전쟁의 도화선이 돼 왔다. 2년 넘게 계속되는 러시아-우크라 전쟁은 물론, 옛 유고슬라비아 전쟁(1991~1995)과 코소보 전쟁(1998~1999), 러시아-조지아 전쟁(2008) 등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과 나토는 각각의 분쟁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에스토니아와 비슷한 역사를 겪은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는 러시아인이 25% 거주한다. 독립 뒤 라트비아 정부는 소련군 점령(1940.6.16) 이전에 이주한 러시아인에게만 국적을 부여했다. 이후 이주자에겐 '점령자'의 레테르를 붙여놓았다. 자이니치(재일동포)와 다른 경로를 밟아 라트비아에서 나고 자랐건만 많은 러시아인이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 전쟁 전부터 러시아계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항의해 유럽인권재판소에 여러 번 소송을 제기했고, 주러시아 라트비아 대사관과 영사관에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화염병 공격을 자행했었다.
리투아니아는 그나마 인종적으로 러시아와 관련이 적다. 러시아계 주민이 5%에 불과하다. 에스토니아(23.7%)와 라트비아(24.4%)와 비교하면 인종 분규의 위험이 적다. 그러나 러시아 동맹국인 벨라루스 및 러시아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기타나스 나우세다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당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토 조약 4조에 따른 안보협의를 신청했다. 특히 칼리닌그라드~러시아 간 수바우키(Suwalki)) 회랑의 물류 이동을 차단, 러시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러시아 번호판 차량의 입국도 금지했다.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이 참석했던 지난해 나토 정상회의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이유가 있다. 상호 대사를 추방한 뒤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공사급으로 낮아졌다.
러시아가 발트 3국을 침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크라와 달리 나토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나토-러시아 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다. 문제는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면서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 전쟁 이후 세계가 우려하고 있는 확전의 가장 약한 고리가 발트 3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러시아와 역사 전쟁 및 '하이브리드 전쟁'에 휩싸여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지난 30일 에스토니아의 칼라스 총리와 타이마르 페테르코프 국무장관 및 시모나스 카일스 리투아니아 문화 장관을 나란히 수배자 명단에 올렸다. 2년 전 나르바의 소련군 기념물이 파손된 것에 대한 상징적 조치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러시아에 대한 적대행위와 역사적 기억을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도 함께 명단에 올렸다.
반나치, 반파시즘은 우크라의 나토 가입 봉쇄 및 돈바스 지방 러시아계 주민 박해와 함께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한 3대 명분이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2차대전과 우크라 전쟁을 같은 반파시즘과의 전쟁으로 선전하고 있다. 전승기념물을 파손한 에스토니아 총리를 교전 중인 우크라 대통령과 같은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도 '역사 전쟁'의 연장으로 보인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노골적인 적대 시 정책 탓에 러시아와 국가, 부처, 부문 간 모든 교류가 끊겼다"라면서 "러시아는 비대칭적 조치로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5일 전했다.
나토와 러시아 경계에서는 위치정보시스템(GPS) 교란에 따른 항공기 운항 차질이 증가하고 있다. 발트 3국에 국한된 건 아니다. 나토는 2일 성명을 통해 러시아가 발트 3국과 체코, 독일, 폴란드, 영국에 대해 사이버 및 전자장비 교란과 가짜 뉴스 유포 등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규탄했다. 러시아가 전쟁 중 방어 차원에서 취한 조치인지는 분명치 않다. 발트해에 감도는 긴장이 우크라 전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끝날지, 지속적인 긴장으로 남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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