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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탑> 라면과 소주

칼럼/정동탑

by gino's 2012. 2. 2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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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2006-04-18|30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640자

 

먼저 눈에 보이는 색이 달라졌고, 입맛을 버렸으며, 결국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서울 시내의 달라진 풍경은 빨간색 간판이 늘었다는 것이다. 홍등가와 정육점, 자장면 집 간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붉은색이 업종과 상관없이 거리 곳곳을 물들였다. 배설물로 영역 표시를 하는 야생동물처럼 또는 빨강 루즈를 잔뜩 바르고 행인의 눈길을 끌려는 매춘부를 연상시킨다. IMF와 빨간 간판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다. 모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눈길을 쉽게 흡입하는 빨간색이 동원됐으며 너나 없이 마케팅 마인드로 무장한 결과, 세상은 난전으로 변했다. 실제로 IMF 세파를 겪은 1998년 말부터 빨간색 간판 원자재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그나마 간판 바탕색에서 원색의 적색 비율이 50%를 넘지 못하도록 한 지자체의 방침으로 풍경이 조금씩 본색을 되찾아가지만 어떻게해서든지 '유사 빨간색'을 넣으려는 시도는 여전하다.

기세를 더하는 적색이 또 있다. 바로 '먹거리의 적화(赤化)'다. 20여년 전 처음 출시된 안성탕면은 당시 독보적인 얼큰한 맛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신제품 라면이 나올 때마다 매운맛의 강도는 높아졌다. 최근에 등장한 한 틈새라면은 매운맛에 이골이 난 한국인의 위장으로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운 매운맛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래도 안 먹을래" 하는 오기마저 느껴진다. 빨간 간판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으려는 심리와 마찬가지다. 마케팅 마인드는 어느 순간 소비자의 혀와 위장에 가장 자극적인 여운을 남기는 맛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색과 마찬가지로 매운맛도 중독성이 강하므로.

라면뿐이 아니다. 대중음식점에서 접하는 음식 역시 갈수록 매워지고 있다. 웅숭한 맛을 우려내기보다는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음식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혀와 위장의 내성을 시험하고 있다. 최근 호객에 성공한 묵은지 역시 매운맛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역사상 지금처럼 독한 고춧가루에 중독된 적이 언제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 않아도 간질환이 많은 나라다. 서민의 내장은 갈수록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할 형편이다.

갈수록 순해지는 것도 있다. 다름 아닌 소주 맛이다. '알코올 도수 25'의 상식이 무너진 지 오래다. 최근엔 20도짜리 신제품이 나왔으니 10도짜리 소주가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쓴맛이 줄어든 자리에는 예외없이 단맛이 들어선다. 이 역시 IMF 이후 현상이라고 진단하면 과장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짧은 순간에 강한 자극을 줘야 한다는 상업적 마인드가 풍경과 먹거리의 적화를 확산시켰다면 반대의 강박관념도 있다.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웰빙 문화가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된 것이다. 독한 소주보다는 약한 소주가 몸에 좋다는 강박관념을 노린 얄팍한 상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이 먹은 것의 총합'이라고 한다. 이 말에 비추어보면, '포스트 IMF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속은 고춧가루에 다치고, 인공 감미료에 상하는 칵테일로 변하고 있다. 맥도널드의 세계화 만 탓할 게 아니다. 부자연스러운 맛의 습격이 우리에게는 더 가깝고, 절실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본색의 풍경과, 제맛의 먹거리가 그립다.

김진호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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