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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절린 카터가 타계했다. 온 미국이 슬픔에 잠겼다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11. 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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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통령의 정치적인 아내였다고? 아니다. 정치의 동료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18세 소녀는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던 세 살 터울의 동네 오빠와 첫 데이트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19세를 한 달 남기고 면사포를 썼다. 이후 77년을 부부이자 동료로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조지아주 남서부의 농장마을 플레인스 출신. 부부는 닮는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성격은 물론 외모도 비슷했다. 신심이깊었고 검소했다. 종종 고집불통이기도 했다. 19일 향년 96세로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이야기다.

미국이 슬픔에 잠겼다. 갈수록 부박해지는 미국 정치 풍토이건만, 민주·공화당을 막론하고 국민적 슬픔을 함께 했다.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 부부의 유독 현란한 언행에 물린 것일까. 미국 신문을 도배한 로절린의 부음기사에 눈길이 꽂혔다. 어떻게 살았기에 온 나라가 애도할까. 

시골 처녀에게 남편은 세상으로 나가는 '배'였다. 해군 장교 남편을 따라 넓은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세상 나들이는 7년으로 끝났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남편이 가업을 잇기 위해 제복을 벗었기 때문이다. 다시 플레인스의 땅콩농장으로 돌아왔다. 남편에게 왜 돌아가야 하느냐고 따지고, 울고, 소리쳤다.

남편은 다시 '배'가 되어서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땅콩 농부로 살면서 카운티 교육위원회와 시민단체 일에 관여했다. 1962년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18년 동안 정계에 몸을 담았다.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미합중국 대통령 자리에 도전했다. 남편은 타고난 정치인이 아니었다. 아내가 팔을 걷어붙였다. "선거는 재미가 없었다. 늘 속이 더부룩했다." 당 관료들과 회의를 했고, 유세를 도왔으며, 직접 연설도 했다. "그런데 남편 이름이 지미…, 뭐라고요?" 1976년 대선, 미국 남부의 주지사 출신 민주당 후보는 인지도가 낮았다. 그녀가 남편의 유세장에 동반하는 대신에 따로 41개 주를 돌며 지지를 호소한 까닭이다. 연방정부 사회보장제도(메디케어)에 더 많은 노인 돌봄센터를 설립하는 공약을 창안했다.

19일 작고한 로절린 카터가 2006년 6월 1`3일 미 조지아주 애틀란타의 카터 센터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웃고 있다. 그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백악관 생활 4년 뒤 40여 년 동안 글로벌 인도주의자로 활동해왔다.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빌과 힐러리 클린턴이 "하나 장만하면, 하나 더 준다(Buy one, get one free)"라고 외치며, 대통령 부인의 정치적 역할을 약속하기 16년 전, 로절린은 이미 정치하는 대통령 부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카터가 주지사에 당선된 1970년부터 정신질환자 치료 환경 개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조지아주 '정신 및 정서장애인 환경 개선 특위' 책임자에 정식 임명돼 주내 치료시설을 발로 뛰며 실태 파악을 했다. 특위의 제안은 상당 부분 입법화됐다. 백악관 '보건의료 개혁 전담반'의 팀장으로 일했던 힐러리의 선례였다.

로절린은 "정신질환 아동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조지아주 퍼스트레이디 시절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였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50년 동안 몰두해 온 일이다. 이번엔 남편이 마련한 '배'가 아니었다. 스스로 찾은 소명이었다. 로절린은 대선 유세 중 전미정신질환협회 이사가 됐고, 성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전미여성기구(NOW)로부터 상을 받았다.

부부는 1977년 대통령 취임식 뒤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연방 의사당에서 백악관까지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손잡고 걸었다. 그 몇 년 전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의 암살을 잇달아 본 미국민에겐 그 자체가 치유였다. 로절린의 취임 축하연 드레스는 6년 전 주지사 취임 축하연에 입었던 같은 옷이었다. 백악관에 입주한 뒤 "홍차나 콜라를 대접하는" 전통적인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거부했다. 대통령 직속 '정신질환 특위' 위원장의 일을 맡았다.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자신의 사회적 활동을 이어갔다. 1984년 자서전 <플레인스 출신의 퍼스트레이디>에서 당당하게 남편의 '정치적 동료'였다고 밝힌 연유이다.

지미와 로절린 카터 부부가 5년 전 조지아주 애틀란타의 메르세데스벤츠 경기장에서 애틀란타 팰컨스와 신시내티 벵골스의 미식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2018.9.30. AFP 연합뉴스

로절린은 카터 행정부 각료회의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회의에 자주 참석했다. 주중에는 매일 점심을 들며 정책을 논의했고, 남편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남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국민이 내가 하는 일을 걱정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걸 지적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고, 국민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정말 국민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카터는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77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내가 매우 낙담했을 때 아내에게 자리에 앉아 두 시간 정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몇 마디만 던지면 곧바로 문제점을 짚어 냈다"라고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정치적 활동이건, 사회적 활동이건 줄곧 '한 배'에 탔다.

카터는 재임 중 한반도와 인연을 맺었다. 1978년 5월 26일 "한국군은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스스로 방위할 수 있다"라면서 주한미군의 점진적인 철수를 발표했다. "한국이 스스로 통제할 적절한 전력을 갖췄다"는 판단이자, 같은 해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 협상' 개최를 비롯해 임기 내내 세계 차원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추구했던 소신의 연장이었다.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미국 대통령은 그리 많지 않다. 불명예가 된다. 카터는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졌다. 그러나 백악관 4년보다 이후 40여 년 동안 미국 역사상 어떤 대통령도 하지 못한 공인의 역할을 해냈다. 인권과 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퇴임 후 더 존경받았다. '정치 이후의 정치'이자 글로벌 활동가의 삶이었다. 그 모든 여정의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료가 로절린이었다.

로절린은 지난 5월 30일 치매 진단을 받고 집 근처 호스피스에서 생활해 왔다. 긴 결혼생활의 짧은 별거였다. 내년에 100세를 맞는 카터는 지난 2월부터 플레인스의 집에서 호스피스 가료를 받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을 애도의 날로 선포해 모든 연방정부 건물에 조기를 게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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