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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생일날 이스라엘로부터 모욕 당한 '세속의 교황'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10. 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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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엔인들은 우리 생애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두 번이나 인류에 안긴 전쟁의 재앙을 겪고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하여, 다짐한다."

'유엔의 날'인 24일은 유엔이라는 집단안보기구의 창설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다. 유엔 총회가 1947년 선포한 이날은 유엔 헌장이 탄생한 날이다. 하필 이날 '세속의 교황'이라 불리는 유엔 사무총장이 안방에서 '싸대기'를 맞았다.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즉각 사퇴하라"는 삿대질을 받은 것이다.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촉발된 중동 문제를 다룬 제9451차 안보리 회의 석상에서다. 세계적으로 각종 기념행사가 치러지면서 유엔 헌장의 정신을 되짚어 보고 각오를 새롭게 해 온 생일이 난장판이 된 것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인도적 참상이 발단이 됐다.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가 24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이스라엘인 인질들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비난 발언은 안보리 회의장 밖에서 한 별도의 회견장에서 나왔다. 2023.10.24. AP 연합뉴스

리야드 알 말리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 외교장관은 "더 많은 불의와 더 많은 살인은 물론 많은 무기와 동맹이 아닌, 오직 팔레스타인과 그 주민들과의 평화만이 이스라엘에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면서 국제법과 평화를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운명이 언제까지 박탈당하고, 이주당하며, 권리를 부정당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가 (이스라엘과) 평화와 안보를 나눌 조건"이라는 말이다. "가자지구 주민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의 전쟁을 즉각 멈춰야만 인도적 재앙의 확대와 분쟁의 지역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잠시 뒤 마이크를 잡은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교장관은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레바논, 시리아 등에 퍼붓고 있는 공격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10·7 학살에 대한 '비례적 대응'은 생존의 문제"라면서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세계의 전쟁"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지난 7일 하마스의 공격은 역사에 잔인한 학살로 기록될 것"이라면서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에 대한 자명종 소리(wake-up call)"라고 말했다. 하마스에 붙잡힌 이스라엘인 인질들의 사진모음판을 들고나온 그는 "하마스는 신나치"라면서 카타르가 인질 석방 중재에 나서줄 것을 촉구했다.

사달이 난 것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총장의 상황 평가 발언이 나온 뒤였다. 구테흐스 총장은 현상을 평가한 뒤 특히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이 국제법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마스의 공격이 진공상태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56년 동안 숨 막히는 점령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팔레스타인 주민의 환란이 하마스의 끔찍한 공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로 인해 집단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이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의 정도와 지역사회의 총체적인 파괴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 심히 걱정된다"고 개탄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국제 인도주의 법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이날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던 유엔 구호단체 직원 35명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교장관이 24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이스라엘인 인질들의 사진판을 내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2023.10.14. 유엔 누리집

이스라엘의 반응은 일단 엑스 계정 메시지로 표출됐다.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대사는 곧바로 "사무총장 즉각 사퇴"라는 메시지를 날렸고, 코헨 장관은 이날 구테흐스와 예정됐던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회의장 밖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은 사무총장 규탄 대회를 방불케 했다. 코헨은 이스라엘인 인질 가족들과 함께 회견장에 나와 "인질들은 2, 3세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이라며 "하마스는 IS(이슬람국가)보다 더 끔찍하다"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인 1400명의 희생을 한껏 강조하면서, 5000명을 넘어 시시각각 불어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희생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뒤이어 연단에 선 에르단 대사는 아예 "(코헨 장관이)사무총장과의 회담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린 점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회담이 취소된 이유를 설명하겠다"면서 "그(구테흐스)는 이스라엘인들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통분했다. 특히 "하마스 공격이 진공에서 일어난 게 아니다"라는 발언을 집어 "점잖은 사람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라고 비난했다. "하마스가 저지른 것과 같은 잔혹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은 실패했고, 사무총장은 도덕성과 모든 공정성을 잃었다"며 외교적 표현의 선을 넘었다. 눈을 부릅뜬 채 "대체 SG(총장)가 어떻게 그런 말로 하마스의 잔인한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사퇴를 공개 요구했다. "즉각 사과하지 않는다면 이 (유엔본부)건물의 존재 이유가 없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되레 뒤에 서 있던 인질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 역시 가자 지구의 인도적 참상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구테흐스의 이날 발언은 기실, 팔레스타인 측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일관되게 표명하고 있는 수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말이었다. 항공모함 전단 2개를 파견해 이스라엘의 뒷배를 보아주는 미국 조야조차도 하마스의 공격을 비난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을 우려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진입을 늦추라고 촉구하는 이유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안보리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하마스의 대학살 탓에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인도주의 휴전을 촉구했다.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다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들이 23일(현지시간) 가자시티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중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로 양측에서 현재까지 6500명 이상이 숨졌다. 2023.10.24. AP 연합뉴스

구테흐스는 사태 초기부터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관점을 유지해 왔다. 지난 20일 가자 주민의 유일한 생명줄인 이집트 라파 통로를 방문한 뒤 "인도적 재앙이 실시간 벌어지고 있는 역설을 보았다"면서 "이스라엘의 공습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선언했다. 유엔 헌장의 정신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기도 하다. 헌장은 앞머리에 △다음 세대의 수호와 함께 △근본적인 인권과 인간의 존엄 및 가치와 남성과 여성의 또 대국과 소국의 동등한 권리를 거듭 확인하고, △정의와 조약과 국제법의 다른 원천에서 비롯되는 의무의 유지 △더 큰 자유 안에서 사회적 진보와 더 나은 삶의 기준 증진 등 4가지 창설 목적을 명토박아 놓았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코헨의 갑작스러운 회담 취소에 대해 "사무총장이 인질 가족 대표들을 만나는 자리에 이스라엘 유엔 대표부 대표들이 참석할 것"이라고 답했다.(유엔 뉴스) 

유엔 헌장 탄생일에 유엔 사무총장이 그 정신에 들어맞는 발언을 한 것을 놓고 193개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의 유엔 대사가 대놓고 비난하는 상황. 세계가 목도한 유엔의 현주소이자, 현 이스라엘 극우 정부의 진면목이다. 이스라엘이 2, 3세 아기들은 물론, 가자지구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생명조차 극한상황으로 내몰면서 팔레스타인인의 생명을 털끝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인간이하(sub-human)'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반유엔적, 반국제법적 행동을 묵인하는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유엔 헌장이 규정한바, 근본적인 인권과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할 인간에는 '민족'도 '국가'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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