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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영업사원'에서 '위안스카이'까지, 기묘한 '남북 커플링'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3. 6. 1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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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하이밍 대사를 보면 위안스카이가 떠오른다는 말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

"내가 지금 중국 외교부장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 사절 이홍장과 회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만나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오른쪽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앉아 있다. 북한 외교의 실세였던 강 제1부상은 2016년 사망했다. 2009.1.23. 조선중앙TV 연합뉴스

역사의식의 발현일까, 반전의 묘수일까.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의 발언을 둘러싼 한·중 간 갈등은 단순한 논란이 아니다. '정부·여당 대 야당'의 대립 구도가 맞물렸고, 한·중 관계는 물론, 한·미, 미·중 관계의 갈등 요소가 겹쳐 있다. 남북 관계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만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의 용어가 '동조화(coupling)'하는 기현상이 거듭 눈에 띈다.

먼저 윤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싱 대사의 발언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라며 엄중하게 보는 분위기다. 연합뉴스가 인용한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우리 국민이 느낄만한 감정을 대신 전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통신을 통해 들은 대통령의 한마디는 17년 전 북한 외교관의 말을 연상시킨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중국에 느끼는 한반도 거주민의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석주 전 제1부상의 말은 북한의 1차 핵실험 사흘 뒤인 2006년 10월 12일 중국 선양에서 이뤄진 그와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 간 북·중 비밀회담에서 나온 말이다. 탈북 태영호 의원이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인용한 북한 외무성 회담 기록문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다. 리 부장이 먼저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김일성 수령의 유산을 강조하며 "이제라도 핵 개발을 중지하고 경제건설에 전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자 강 제1부상이 이를 되받으면서 한 말의 첫마디였다. 그는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핵전쟁 훈련을 계속하고 있고, 언제라도 핵무기를 끌어들일 수 있다. 오직 우리의 핵으로 미국의 핵을 몰아내고 미국으로부터 핵 불사용 담보를 받아낼 때만이 (조선반도 비핵화는)가능하다"면서 북한의 핵 개발 논리를 정당화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2022.11.15 연합뉴스

본론보다 청나라 말 실세 정치인이자 조선 정책을 주물렀던 '이홍장'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상대의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화법이었다. 청이 한반도 종주국으로 군림했던 과거사를 짚는 동시에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중국 공산당의 방침을 되새기면서 단칼에 중국의 핵 개발 반대론을 무장 해제시켰다.

그런데 대통령의 위안스카이 환기와 강 제1부상의 이홍장 환기는 이중, 삼중으로 격이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가지도자가 일개 외국 대사를 빗대 말했기 때문이다. 강석주는 아무리 북한 외교의 실세였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제1부상이었다. 한 단계 격이 높은 중국 외교부장을 상향 공격한 반면에 연합뉴스 보도가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일개 대사를 하향 비난한 격이다. 위안스카이와 이홍장 역시 격이 다르다.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이 보낸 '주재관'에 불과했다. 임오군란 뒤 흥선대원군을 압송해 톈진에 연금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후일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에 올랐지만, 조선에 주재하던 시절엔 철저히 이홍장의 명을 수행하는 발이었다. 북한 차관이 이홍장을 거론했는데, 남한 대통령이 그 하급자인 위안스카이를 언급한 셈이다. 연합뉴스 보도가 '오보'이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는 외교부 국장 또는 부국장 정도가 상대해도 프로토콜에 큰 무리가 없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지난 13일 오후 브리핑에서 비엔나 협약에 따른 '외교관의 직분'을 거론하면서 유감을 표한 것 역시 격에 맞지 않았다. 격의 비대칭이 쌓이면 국격이 무너진다. 정부가 강조하는 상호존중의 정신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당당한 한·중 관계(조태용 국가안보실장)"를 만들기 전에 확인해야 할 '국격'의 문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8일 저녁 성북구 중국대사관저에서&nbsp;싱하이밍&nbsp;주한 중국대사를 만나고 있다. 2023.6.8. 연합뉴스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외교'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강석주는 그 한마디로 중국의 핵 개발 반대 논리를 봉쇄했지만, 우리가 위안스카이를 언급해 중국으로부터 얻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당초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싱하이밍 만남의 주요 계기였던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문제를 가렸을 뿐이다.

강석주 제1부상의 말 화살이 중국 공산당의 논리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한 일종의 차도지계(借刀之計)라면, 문제가 된 싱하이밍 대사의 말 역시 차도지계다. '베팅'이라는 말은 바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 시절부터 즐겨 사용해온 말이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부통령 자격으로 방한했을 당시 중국 쪽으로 기우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국에 역행해 베팅하는 것은 좋았던 적이 없다(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고 말해 한국 정부를 당황케 했다. 2021년 대통령에 취임해서는 더 자주 쓰고 있다.

지난 8일 자에 게재된 바이든의 월스트리트 저널 기고문은 제목 자체가 "미국 경제에 역행해 베팅하지 마라(Never Bet Against the America)"였다. 공교롭게 같은 날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만난 싱하이밍은 미·중 갈등 속에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데 베팅을 하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자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도박용어로 국가관계를 표현한다면, 우리 입장에선 미·중 어느 쪽에도 '올인'할 수 없는 처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 국방부 새해 업무보고 자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nbsp; 2023.1.11&nbsp; 대통령실

싱하이밍-위안스카이 비유는 리자오싱-이홍장 비유뿐 아니라 이번 정부 들어 종종 드러나는 남북 간 용어의 동조화 현상을 상기시킨다.

대통령이 즐겨 쓰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육군의 경우 지휘관의 지프차에 '1호'를 적고 있다. 공군 1호기는 대통령 전용기다. 하지만 북한에선 아무나 '1호'를 사용할 수 없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에만 '1호'를 사용한다. 북한 ’최고존엄‘이 참석하는 행사는 '1호 행사'로 표현하며, 사진조차 '1호 사진'이라고 부른다.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발행한 <전시사업세칙>은 집에 불이 나도 ’1호사진‘부터 안전한 곳에 옮겨놓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갑자기 '1호 영업사원'을 자청하면서 북한에서 쓰는 의미와 비슷해졌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지난 9일 국책연구소 전문가와 주한 외교사절, 학계, 관계, 학생 등으로 구성된 청중을 상대로 "앉아 있는 분들의 성분이 다양하다"는 말을 했다. '성분'은 유기체의 한 부분 또는 사물의 특성을 뜻한다. 사람에 대해 이 말을 쓰는 곳은 남한이 아닌, 북한이다. 유물론을 기본으로 하는 북한에서는 출신배경이라는 말 대신 '출신성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반도 거주민이 강대국에 자주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중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도 그랬으면 할 뿐이다. 또한 전혀 '가치'를 공유하지 않으면서 용어가 동조화되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남북이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민족임을 새삼 일깨운다. 

 

이홍장 위키페디아
위안스카이 위키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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